23. 박승준(1884/5-1969)

손상웅 목사 (SEED선교회 연구실장)

박승준(朴丞鵔)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1885년 5월 30일에 태어났다고 하고 1884년 5월 28일에 태어났다고도 한다. 그가 하와이 감리교 목회자였던 최진태의 처남임으로 한국에서 감리교 교인이었거나 아니면 성공회 교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강화에서 농업에 종사하다 도릭 선박에 승선하여 1904년 5월 6일에 하와이에 도착한 21세의 총각이다.

한인 평신도 사역자

박승준은 하와이성공회가 1863년에 세운 이올라니 학교에 입학했다. 이올라니는 하와이 언어로 ‘하늘의 독수리’라는 뜻이다.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사40:31)의 말씀대로 그의 믿음은 남달라 이올라니 학교의 재정 후원자였던 그리스도성공회 D.D. 월레이스 사제의 제의를 받고 코나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성공회 사역을 보조한다. 월레이스 사제는 박승준을 만나기 이전에 자신의 목회 지역인 코나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위하여 18개월 간 예배를 집례하였다. 이들 한인들은 25년간 토지를 임대하여 채소와 커피를 재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웰레이스 사제는 교회 개척이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박승준은 이올라니 학교를 졸업하던 1911년 여름까지 코나 사역을 감당했다.

1908년 박승준은 학교에 다니면서 호놀룰루 시내의 여러 교회와 시외 와이마날로 지역의 한인들을 섬겼다. 이올라니 학교를 졸업한 1911년 가을부터 28세의 박승준이 하와이성공회로부터 한인 평신도 사역자로 임명받고 성 엘리자베스성공회 윌리암 E. 포트와인 사제를 돕는다. 1910년 현재 4,533명의 한인이 하와이에 거주했고, 이 중 남자는 3,931명이었으며 여자는 602명이었다. 한국어 예배는 매주 오전 9시 반에 있었고, 수요일 저녁에도 예배가 있었으며, 매달 셋째 주일에는 성만찬식이 있었다. 박승준의 지도로 1912년 10월에 15명이 견진 성사를 받았고, 20명이 세례를 받았다. 1913년 사순절 주일에 30여명의 회중이 38불을 헌금하여 하와이 교구 지도부는 박승준과 한인 회중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이 액수는 majoringworth.com에 따르면 2015년 현재 685불에서 17,300불에 해당한다. 박승준의 1년 6개월의 사역기간 동안 60여명이 견진 성사를 받았고, 주일 예배 참석 회중은 40명에서 70명으로 증가하였으며, 35명의 어린이들이 주일학교에 출석했다는 보고가 있다. 이외에도 박승준은 주일 오전과 오후에 기도회를 설치하였으며, 금요일 저녁에는 부인과 소녀를 나누어 성경공부반을 개설하였고, 주일 오후 2시에는 남자 성경공부반을 열었다. 연령별로 젊은 부인회와 장년부인회를 조직하였다. 국어학교를 개설하였는데 40여명의 어린이들이 공부했고, 야간에 성인 영어공부반을 운영했다.

하와이 국민회

1909년 2월 재미 한인이 조국 광복을 목적으로 국민회를 창립했다. 하와이에서는 휴업하고 한인 주택마다 태극기를 달았으며, 각 농장과 관청에서 이 날을 한인의 기념일로 인정하여 하와이 총독 대리 등이 참석한 가운데 1천여 명의 동포가 호놀룰루에 모여 경축했다. 1913년 5월 하와이 국민회가 법인설립을 할 때 박승준은 정칠래, 박원걸, 박용만, 홍인표와 함께 법인헌장에 서명하였다.

사제

1909년 90여 명의 한인 회중이 성 엘리자베스 성당 등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영어 예배를 이해할 수 없어 많은 한인이 참석치 못함으로 한국어 예배를 인도하고 한국어로 설교할 수 있는 사제를 선정해 줄 것과 한인들이 따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간청한 5년이 되던 1914년 9월 하와이 주교 레스태릭 주교의 추천으로 박승준은 샌프란시스코성공회신학교에 입학했다. 본 신학교를 졸업한 박승준은 호놀룰루성공회의 사제 후보생이 되었다. 1916년 6월 14일 박승준은 레스태릭 주교의 요청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캘리포니아 교구의 니콜스 주교로부터 부제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미국성공회의 최초 한국인 신부가 되는 영광을 누린다. 1914년 박승준은 상항에 거주하는 남자 50명, 10명 이상의 부인과 7명의 자녀를 방문했다. 그들은 성공회 교인이었으나 한인감리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그는 3년간 공부하던 기간 이들과 교리공부를 했을 수도 있다. 존 박으로도 불린 박승준은 1916년 7월 하와이 성엘리자베스성공회 한인 회중을 위한 신부로 부임했다. 부임 예배에서 레스태릭 주교는 신부가 부족한 가운데 어렵게 신앙을 지켜온 한인들을 치하하고 박 신부의 사역을 통하여 영적 삶이 깊어지고 매일의 삶에 성장이 있기를 기대했다. 박승준 신부는 이듬해 6월 3일에 성안드레 성당에서 하와이 교구의 레스태릭 주교로부터 안수를 받고 사제가 되었다.

성누가 선교회

1917년 부활절에 성엘리자베스성공회 한인 회중은 ‘성누가선교회’라는 명칭을 받는데 기도처와 같은 미조직 교회였다. 71명의 등록 영성체자가 있었고, 40여명의 어린이가 주일학교에 출석했다. 20여명이 젊은 부인회에 소속되었고, 30여명이 장년부인회에 가입했다. 그리고 60여명의 어린이가 한글학교에서 공부했다. 1917년 7월에 성안드레성당 부인회의 후원으로 3천불을 들여 건물을 구입하고, E.C. 페리 부인이 이 건물에서 거주하면서 남녀 성인을 위한 ‘야간학교’와 부인과 어린이를 위한 ‘오후반’을 운영하였다. ‘매일학교’는 성 엘리자베스 성공회의 부속 건물에서 약 100명이 등록한 가운데 운영했다. 박승준은 1918년 2월까지 2년간 사제로서 성누가선교회에서 사역했다.

성누가선교회 지부

박승준은 최 존이 섬기던 하와이 섬 코할라 지역과 자신이 섬겼던 코나 지역의 한인 회중도 섬겼다. 코나 지역은 감리교 교인들이 목회자가 없어 근처 성공회 교회에 다녔을 때 박승준이 순회전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박승준은 이와 농장에서 매주 예배를 인도했다. 이와 농장에 부인전도회를 조직하였고 1917년 부활절에 성누가선교회 지부가 이와 농장에 조직된다. 이 날 48명의 한인들이 세례를 받았다. 이와 한인 성공회 선교회는 ‘부인성경반’을 개설하고, ‘한국학교’를 열어 60여명의 남녀 어린이들이 한국어를 배웠으며, 1920년에는 ‘야간학교’가 문을 열어 남녀 성인들이 영어를 학습했다.

항일투쟁

1917년 3월에 국민회 하와이 총회의 구제원으로 선임되면서 성공회 사제인 박승준이 항일투쟁에 발을 내디딘다. 이듬해 12월 박승준은 사제직을 사임한다. 1921년 4월 하와이 대한인 교민단을 조직할 때 그는 상무원으로 피택되었고, 그 해 6월 호놀룰루 한인상업회를 결성할 때 총무가 된다. 1935년 1월 박승준은 하와이 국민회의 팔라마 대의원이었는데, 다음달 2월에는 외교를 맡았다. 그는 군자금과 독립금, 군사운동금 등 항일투쟁에 필요한 재정 후원에 최선을 다했다.

감리교 목사

박승준은 39세였던 1920년 2월 12일에 메리 김과 결혼하여 슬하에 요엘과 아이삭 그리고 대니 등 세 아들을 두었다. 1922년에는 상품판촉원으로 일했는데 1923년에는 카후쿠 한인감리교회 목사가 되고 있다. 1924년 본 교회에 황사용이 부임하기 전까지 길어도 1년간 사역한 것으로 보인다. 부동산 중개업자로 활동하던 박승준은 1969년 4월 19일에 향년 88세로 하와이에서 소천했다. damien.soh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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