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김익성

손상웅 목사 (SEED선교회 연구실장)

김익성(金翊成)은 1870년경에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10살 차이가 나는 부인과 결혼하여 30세가 되던 1900년에 아들을 낳았다.

개성 남부교회

김익성이 아들을 낳기 한 해 전인 1899년 12월에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인 찰스 T. 콜리어 목사가 개성에서는 최초의 교회가 되는 남부교회를 설립했다. 윤치호의 이모부이자 개성의 유지였던 이건혁이 중요 개척 멤버였고, 김익성은 본 교회의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김익성이 콜리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보여진다. 그의 세례명은 ‘이사야’였다. 1905년 본 교회 부인들이 자진하여 '성미봉헌 운동'을 시작했고, 이러한 운동이 교회 부흥을 이끌었는데, 김익성은 1년 전까지 본 교회 평신도 지도자였음으로 그의 지도력에서 가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와이

김익성은 개성에서 서울로 이주한다. 김익성(Kim Ik Sung)이 1904년 5월 6일에 도릭호를 타고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가 34세 때다. 24세의 부인과 4세의 아들이 동행했다. 호놀룰루에 도착한 김익성과 그의 가족은 하와이의 와이파후로 이주하고 이곳 농장에서 노동했다. 그런데 김익성이 이곳 와이파후에서 감리교 윤병구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그 후 김익성은 와이파후에서 카후쿠로 이주했다.

신민회 비판

1903년 11월 홍승하의 지도로 감리교 계통의 인사들이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구국정신을 고취하여 일제의 침략행위를 제어함을 목적했고, 동족단결, 민지계발, 국정쇄신을 강령으로 내세웠다. 그런데 김익성이 최윤백 등과 함께 신민회의 명칭이 신민(臣民)이 아니라 ‘신민(新民)’이라는 점과 강령에 ‘국정쇄신’을 내건 점 등을 들어 대한제국을 전복하려는 반역행위라고 비난하면서 신민회를 대한제국에 고발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의식 이외에도 한인들의 종교적 분파와 전대금 수봉사건 등으로 1904년 4월 신민회는 결국 해체되었다.

신조신문

1904년 3월 신조신문이 발행될 때 김익성이 주필이었다. 사장에 최운백 그리고 번역에 최영만이 맡았다. 호놀룰루에서 한글로 논설과 잡보, 외보, 광고로 구성하여 손으로 써서 등사판으로 밀어 1년여 동안 2회 발간되다가 그 이듬해 4월에 재정난으로 폐간되었다. 그러나 신조신문은 하와이 한인 동포에게 지식을 계발하고 대한제국의 자주 독립을 고취하려는 열성이 있었고,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본다.

하와이 성공회

1905년 김익성은 최진태와 정현구 등과 함께 하와이 성공회 감독 헨리 B. 레스태릭을 찾아가 한인 성공회를 세우도록 부탁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 해 2월 호놀룰루의 목조 건물인 성 안드레 성공회의 ‘프로 성당’ 친교실에서 하와이 한인 성공회 성립예배가 있게 된다. 이후 김익성은 박 존과 더불어 평신도 한인 전도사로 활동한다. 코할라 성 어거스틴교회 한인 회중에게서 한국어 기도문을 빌려와 손으로 베껴 사용하였고, 한국 성공회 아더 B. 터너 주교가 보내준 한글 공도문을 이용했다. 한인 성공회의 담임사제인 성 엘리자베스 성공회의 윌리암 E. 파트와인 사제의 지도하에 김익성은 전도하고 모임을 인도했다. 그는 1909년 11월 2일 신한국보에 “이번에 본국서 국문신구약이 본 교회에 다수히 래도하였으니 여러 형제자매는 기회를 잃지 말고 즉시 사다 보시오. 우(송)비는 따로 받음”이라는 광고를 내고 성경 보급에도 열심을 냈다. 그런데 찬미 소리가 크다는 불평이 일어나 한인 성공회는 이올라니 학교 건물에서 1908년에 파트와인 사제가 섬기던 성 엘리자베스 성당으로 이전했다. 본 성공회는 1902년 10월에 중국 이민자들을 위해 창립했고, 1905년 5월에 성당을 건축하였다. 한인 성공회는 두 번의 미사를 드렸는데, 주일 오전 미사는 영어로 중국인 미사보다 1시간 먼저 10시에 드리고, 저녁 미사는 한국어로 드렸는데 중국인 미사보다 뒤에 드렸다. 김익성은 파트와인 사제와 협력하여 미사 순서에 참여했다. 김익성은 오전과 오후에 영어 성경반을 시작했다. 교사는 파트와인 사제가 맡았다. 김익성은 ‘10계명 교리문답’과 한국의 터너 주교가 보내준 ‘가상칠언’을 등사하여 교재를 준비했다. 한인 성공회는 이른바 오늘날의 다민족 선교의 일환이었다. 파트와인 사제는 일본인과 하와이 원주민에 이어 한국인까지 자신의 성당에서 자국민의 언어로 영혼을 구원하려는 선교의 손길을 뻗쳤던 것이다.

주일학교와 야간 영어반

1905년 김익성은 레스태릭 감독과 협의하여 성공회 교인이었던 E.C. 페이 부인과 샌즈 집사를 초빙하여 어린이 주일학교를 개설했다. 주일학교는 약 11년간 계속된다. 김익성은 주중 주일학교도 개설하여 성경과 교리를 가르쳤다. 그는 전흥협회 사무실에서 야간 영어반도 샌즈 집사와 E.C. 페리 부인 개설했다. 주일학교 교사였던 미국인 부인들이 영어반 교사로 섬겼다. 이들 미국인 교사들은 학생들을 성 안드레 성공회 영어 미사와 성 엘리자베스 성공회 중국어 미사에 초청하는 등 전도에도 열심이었다.

국어반

1906년 경 김익성은 성 엘리자베스 성당에서 매일 오후에 국어반을 개설하고 교장이 되었다. 그는 1914년까지 교장을 역임했다. 학생들이 많을 때는 80여명에 이르렀다. 국어반은 한글뿐만 아니라 한자와 산수도 가르쳤다. 본 국어반은 진주만 폭격이 있던 1941년 12월까지 약 35년간 계속되었다.

성 메리교회와 전흥협회

김익성은 성 누가 성공회 외에도 호놀룰루의 백인 성공회인 성 메리 성당에 출석하는 한인들을 위하여 통역하고 어려움을 해결하는 등 한인들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었다. 그리고 교도소를 방문하여 한인 동포들에게 십계명을 가르치는 등 전도하고 상담했다. 이는 국외 한인 교도소 사역의 최초로 보여 진다.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는 등 대한제국의 국가적 위기를 알게 된 김익성은 1907년 호놀룰루에서 박상하, 최병현, 조병요 등 성공회 교인 50여명과 함께 전흥협회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되었다. 복벽주의적 성향을 가졌던 그는 충성을 다하여 국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1908년 9월에 전흥신보를 발간하였고, 후에 전흥월보로 바뀌면서 매달 발간된다. 그는 1909년 1월에 전흥협회가 하와이 합성협회에 합동하기까지 활동했다.

성 누가 한인성공회

1908년 성 누가 한인 성공회의 재적수가 100여명에 이르렀는데 이중 14명은 한국에서 영세를 받고 이곳에서 견진성사를 받았다. 그 해 박상하, 조병요, 이봉선 등 12명이 영세를 받았고, 이봉선은 그 후 40년간 전도부인으로 봉사했다. 1909년 1월말 주일 오전 미사에 44명이 참석했고, 같은 날 저녁 미사에서 7명이 영세를 받았다. 1906년에는 성인 남성으로만 구성되었었는데 반해 1909년에는 교인의 절반이 부인과 자녀들이었다. 1909년 2월 성공회 교회보가 보도한 대로 한인 회중의 성실함과 경건한 예배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사임

191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김익성은 호놀룰루의 중국인 사무엘 K. Y. 리의 집에 방을 얻어 살면서 통역관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아들 베드로는 있었지만 그의 부인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아 혹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1911년 김익성은 평신도 한인 전도사직을 내려놓게 된다. 북한에 선교의 문이 열려 광명교회가 개성남부교회를 재건하면 김익성의 사진과 그에 대한 자세한 행적이 들어날 것을 믿어 마지않는다. damien.soh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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