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 전 한인 선교사

19. 이경직

손상웅 목사 (SEED선교회 연구실장)

이경직은 1876년 서울 안국동에서 전주 이씨 효령대군 16대손으로 태어났다. 그는 18세에 배재학당에 입학한다. 개화기의 시류를 좇아 막내아들만큼은 신식 교육을 시키려는 그의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다.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G. 아펜젤러 선교사 등의 원어민 교사가 가르치는 영어학교였다. 1887년 선교 보고서에 따르면 이 학교 학생 7명이 통역관으로 임용되었으니 시작이 좋았다. ‘배재학당’은 고종이 1887년에 하사한 학교이름으로 ‘유용한 인재를 양육하는 집’이란 의미였는데 1891년 아펜젤러는 배재학당보다는 배재대학을 즐겨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아 단순한 영어학교가 아닌 대학으로 발전시키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실제 배재학당에서 받은 학점이 미국에서 인정을 받은 예가 있기 때문이다. 이경직은 배재대학을 꿈꾸는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서 이승만과 주시경 등과 함께 영어는 물론이고 신학문과 성경을 배운다.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 이경직은 정동제일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했다. 1887년 이후 배재학당이 신학교육을 실시했고 현지인 사역자 양성을 목적했음을 알게 된다. 그 후 그가 세례를 받고 등록한 교회였던 서울 동대문감리교회의 제6대 담임교역자로도 섬겼다. 동대문감리교회는 1887년 미국 북감리교 여자 의료 선교사였던 메타 하워드가 동대문 부인진료소를 설치하면서 진료소 안에 기도처도 설립하였는데, 미국 북감리교 의료선교사 윌리암 B. 스크랜톤이 담임목사로 부임하고 루이사 C. 로스와일러 선교사와 이경숙이 담당하면서 동대문감리교회가 된다. 1892년 미국 감리교 선교부 총무인 L.B. 볼드윈 부인의 기부금으로 새 예배실을 짓고 그녀를 기념하여 볼드윈 채플이라고도 불렸다. 이 채플에서 이경직이 목회를 한 것이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1902년 8월 순직했을 때 그의 장례예배에 참석한 이경직이 대표기도를 담당하였다면 아펜젤러 선교사의 사랑하는 제자 중 한 사람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하와이

1904년 5월 6일 29세의 이경직은 20세의 그의 부인 이메림 그리고 두 살 된 아들과 함께 미주 한인들의 목회와 선교를 위해 새로운 땅 하와이에 도착했다. 그 해 11월 이경직과 그의 가정은 바이파후 교회에 등록했다. 이경직은 6년간 한인 노동 이주민 선교 사역을 감당했다. 1905년 하와이 감리교 미션이 설립되면서 조합교회와 감리교는 협약을 통해 감리교는 일본인과 한국인을 전도하기로 결의한다. 1905년 12월의 제 1회 감리교 연회는 이경직을 카우아이 섬의 엘레엘레와 콜로아로 파송했다. 1904년 말 하와이 3개 섬에 14개 교회와 400교회가 있었는데 그가 맡은 콜로아는 16명의 교인이 출석했다. 엘리엘리는 1905년 현재 등록교인이 51명이었고 평균 출석수는 50명이었다. 이경직이 1907년에는 카우아이 섬의 마카벨리와 케쿠아로 파송되었다. 1904년 말 현재 마카벨리에는 22명의 교인이 있었고, 케쿠아에는 18명의 교인이 있었고, 1905년에는 마카벨리에는 등록교인이 38명이었는데 평균 출석은 60명이었고, 케쿠아에는 등록교인이 10명이었는데 반해 평균 출석수는 45명이었다. 이러한 추세로 보면 1907년에는 등록교인과 출석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경직이 1908년에는 무슨 이유에서 인지는 모르나 파송이 되지 않았다가, 1909년에 다시 파송된다. 그는 카우아이 섬의 케알리아와 킬라우이아, 리후에 그리고 하나마울루에 파송되었다. 이들 중 1904년 말에 있었던 교회는 1904년 당시 16명의 케알리아, 12명의 리후에, 17명의 하나마울루 등의 교회였다. 1910년에 이경직은 오아후 섬의 와이알루아, 모쿠레이, 카후쿠 그리고 라이아로 파송되었다. 이중 1904년 말에 있었던 교회로는 92명의 와이알루아, 37명의 카후쿠 등 두 교회다. 이경직은 다른 대부분의 한인 전도사와 같이 지방회 목사 교육반에 적을 두고 1년급으로 홍치범, 현순, 김영식, 민찬호, 윤병구와 함께 공부했다. 1910년 이경직이 목사 안수를 받을 때 민찬호, 홍치범, 김영식, 김유순도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다.

서울 1910년 이경직은 귀국한다. 이듬해 그는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입학한 그 해 12월에 제1회 졸업생으로 졸업했다. 총 41명이 졸업하였는데 이경직 외에도 하와이를 다녀온 자로는 현 순과 이지성도 있었다.

이경직은 협성신학교 재학 중인 1910년 서울 종로교회 교역자로 부임했다. 본 교회는 1890년 헨리 G. 아펜젤러 선교사가 창립했는데 이경직이 섬기던 때는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E.M. 케이블 목사의 지도를 받았다. 이경직은 1913년까지 3년간 봉직하면서 교회사역 이외에도 종로 여자소학교, 종로교회 유치원 그리고 중앙보육학원 등 3개 교육기관을 운영했다. 종로여자소학교는 이화학당의 분교였고, 종로교회 유치원은 1901년에 설립했으며, 유치원 교사 양성기관이었던 중앙보육학원은 중앙대학교의 전신이다. 1911년 7월 경성 일본인 기독청년회는 한국청년회 각 임원과 고명한 목사 등을 일본 시찰차로 청하였다. 이경직도 미이미회파의 9명중 한 명으로 장로교파 6명 청년회 5명 등 총 19명과 함께 동행 했다. 황성기독청년회 YMCA는 1903년에 창립되었는데 창립 이후 1915년까지 종로교회 안에 있었다. 종로교회의 이경직은 1912년 YMCA의 간부로 활동한다. 그 해 5월 이경직은 미국 미네소타 주 미니아폴리스에서 개최한 세계감리교 총회의 한국감리교 평신도 대표로 이승만을 선임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승만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망명의 길을 택했다. 그의 미국행은 미주 내 민족운동의 지지 기반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됐다.

이경직은 1913년 6월에는 서강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그 해 그는 미국 북감리교 조선연회 한국인 서기로도 임명받았다. 그는 1914년에는 인천 인근 부평 북교회와 부평 남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했고, 1915년엔 서울 북창동교회 담임목사를 지냈다. 이경직은 일제 강점기부터 한의사로 활동했다. 이경직 한의원 원장이었던 그의 전문분야는 폐결핵, 백일해, 맹장염, 늑막염 그리고 축농증 등이었다.

만주

이경직은 1916년 일제의 탄압과 압력으로 미국 북감리교 조선 연회에 휴직계를 제출하고 목회 사역을 중단하였다. 이듬해 그는 만주 용정으로 이주해 의료 선교를 감당한다. 그는 한의원을 운영하면서 가난하고 병든 한인 이주민들을 돌보며 하나님의 사랑과 동족애를 몸소 실천하였다. 이경직은 만주 용정의 자택에서 용정감리교회를 개척했다. 램부스 기념교회로 불리는 본 교회는 만주 지역 선교에 큰 역할을 담당할 만큼 발전했다. 1925년부터 1년간 이경직은 시베리아 선교부 산하 북간도 자립위원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교회를 통한 복음 선교를 감당하지는 않았다. 이경직의 부인 이메레(마리아)는 만주에 거주하는 동안 전도부인으로 한인 이주민을 알뜰하게 섬겼다.

다시 서울

이후 이경직과 그의 가족은 함경도 청진으로 이주했다. 10여 년간 만주 용정과 함경도 청진에서 보낸 이경직은 가족과 함께 서울에 다시 온다. 그는 다시 종로교회를 섬기게 된다. 종로 교회는 1930년에 중앙교회로 개칭되었고, 1975년에 인사동으로 이전하였으며, 1983년 하나로빌딩 건물을 신축하고, 하나로 중앙교회로 변신하여 지금에 이른다. 이경직은 1965년에 향년 89세로 소천했다. 그의 아호 석담(石潭)처럼 돌 사이에 흐르는 맑은 물이 되어 소용돌이치는 일제의 거친 역사 속에 복음으로 희망을 나누었다. damien.soh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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