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이교담

손상웅 목사 (SEED선교회 연구실장)

이교담(1880-1936)은 고종 17년 1880년 8월 19일 서울 종로구 청진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한자 이름은 李交淡 그리고 李交倓 등으로 써진다. 그는 평양 남산현교회 권사였다.

하와이

이교담은 그가 23세가 되던 1903년에 하와이 노동 이민에 지원해 그 해 10월 15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다. 하와이로 이주한 이교담은 신민회에 가입한다. 신민회는 1903년 8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홍승하, 임치성, 안정수 등과 함께 조직한 하와이 최초의 한인단체다. 구국 정신 고취와 일본의 침략 행동 반항에 그 목적을 두고 동족 단결과 민지 계발 그리고 국정 쇄신을 강령으로 삼았다. 회장은 홍승하였다. 조직된 지 8개월 만인 1904년 4월에 해체된다.

하와이 감리교 평신도 전도사

‘한인감리교선교회’는 1903년 11월에 미주 한인 이민 역사와 함께 하는 교회로 시작한다. 호놀룰루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통역관 안정수 권사와 우병길을 대표로 선임하고 그 곳 미국 북감리교회 감리사 조지 L. 피어슨 목사와 교섭하여 ‘한인감리교선교회’를 조직하고 리버 호텔 스트리트에 예배처소를 마련하였다. 그 해 10일에 첫 예배를 드렸으며 이를 인도한 첫 담임 교역자는 홍승하 전도사였다.

1904년 4월 ‘한인감리교선교회’가 ‘한인기독감리교회’로 승격되었고 그 다음 달인 5월에 와드만 감독은 이교담을 우병길과 임형주와 함께 ‘한인기독감리교회’ 산하의 ‘지방 전도사’로 임명하였다. 이때가 그가 24세가 되던 해다. 이교담은 하와이의 각 섬을 두루 다니며 흩어져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하는 한인들을 찾아가 전도하고 심방을 하였다. 이교담이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던 때까지 ‘지방 전도사’로 사역하였다. 그가 언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공립신보 회계를 맡았던 1905년 11월 이전에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을 것이다. 아무리 많아도 그의 사역 기간은 6개월을 넘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감당한 사역 기간 이상으로 그의 사역이 이민자에게 주는 의미는 컸다. 왜냐하면 당시 악한 사회 풍조에 휩쓸려 도박과 주색잡기를 일삼는 한인노동자들이 많았고, 때로는 학살당하는 일까지도 있었음으로 심방과 전도 등 선교사역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인기독감리교선교회’에서 변신한 ‘한인기독감리교회’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로 발전하였다.

상항 한인 미이미 미션 홈 권사

1905년 어느 날 이교담은 샌프란시스코에 입항했다. 그는 상항(샌프란시스코) 한인 미이미(미국 북감리교회) 미슌 홈(기도처)에 가입하였다. 당시 미슌 홈의 교역자는 미국 북감리교 태평양 지역 일본 선교 감리사인 H. B. 존슨 목사였다. 이교담은 본 교회 권사로 봉직했다. 당시 속장은 이정래였고, 임치정은 교인이었다. 존슨 목사가 1905년 7월 샌프란시스코의 한인들을 위하여 페지 스트리트 521번지에 집을 마련하고 13개의 침대를 포함하고, 두 개의 거실을 사용하여 예배와 기도회를 인도할 때 이교담은 권사로서 존슨 목사의 목회를 섬겼다. 그 해 9월 현재 입교인, 세례 받은 입교인 그리고 세례 받지 않은 입교인 등 17명이 있었는데 이중에 이교담이 포함되고 그를 제외한 16명이 그에게 맡겨진 영혼이다. 이교담의 권사 사역은 1906년 7월까지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의 권사사역은 1년 미만이다. 이때 미국 남감리교 내한 선교사였던 크라렌스 F. 리드 선교사가 샌프란시스코의 상항 한인 미이미 미슌 홈을 인계받았고, 리드 선교사가 미국 남감리교 소속 한인 전도사 양주삼을 초빙하였기 때문에 이교담의 역할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리드 선교사는 1904년 10월부터 미국 남감리교 중국선교연회 조선지방회 내 태평양 연안 사역을 책임지고 있었는데 그는 1910년 7월까지 샌프란시스코의 미슌 홈을 섬긴다. 공립협회와 공립신보

이교담은 샌프란시스코에 49명의 한인이 밀집되던 190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의 주도로 한인공립협회가 결성될 때 이교담이 참여했다. 그는 임치정과 같이 서기로 선임되어 활동했고, 공립협회 대의원도 역임했다. 공립협회는 1903년에 조직된 친목회의 발전적 기관이었다. 동족 상애, 환란 상부, 항일 운동에 그 목적이 있었다. 본 공립협회는 25명의 한인이 서로 의지하며 생활의 안정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그들이 거주하던 샌프란시스코에서 1903년 9월에 결성된 미국 한인단체 조직의 처음이었던 친목회의 확장이다. 그리고 하와이에서 신민회가 실패한 후에 처음 출발한 정치적 운동 기관이었다. 1905년 11월 14일에 공립협회가 샌프란시스코의 퍼시픽 스트릿에 삼층 건물을 구입하여 사무실을 열었다. 그 달 20일에 미주 한인사회 최초의 신문이자 공립협회의 기관지인 공립신보가 창간되었다. 이때 이교담은 회계를 맡았다. 1906년의 샌프란시스코 지진 1년 후 샌프란시스코로 사무소를 이전할 때 이교담은 공립신보의 인쇄인으로 활동했다. 1907년 3월 국내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이교담은 임치정과 함께 미주 동포를 대상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공립신보 사내에 의연금 총회소를 설치하면서 국채보상운동을 미주동포사이에 확장시켰다.

신한민보에 난 한인연합교보에 관한 보도

한인연합교보

1907년 7월 13일에 한인연합교보를 창간할 때 이교담은 발기인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장로교회 조사 방화중과 감리교회 전도사 양주삼, 미이미교회 속장 이정래, 미이미교인 임치정, 장로교인 장라득과 오대영도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본 한인연합교보는 한인 각 교우를 연합 상통케 하여 신덕을 배양함을 목적으로 한 월보였다. 의연금과 제금으로 지용하고 양주삼과 방화중이 의연금 관리를 맡았다. 본보의 사무실은 상항한인교회당에 두었다. 공립신보 1907년 7월 19일자는 이교담이 2원을 의연금으로 냈다고 보도한다.

대한매일신보사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교담은 공립협회의 조직 강화를 위해 1908년 국내로 파견된다. 귀국 후 이교담은 국내의 대표적 항일지인 대한매일신보사에 입사하는데 내부적으로는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 이완용을 처단하려는 사건에 연루되어 이교담은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풀려났다. 이듬 해 구한말 군복을 입은 이교담에서 언론운동으로부터 무장투쟁으로 간 절박한 지식인의 모습이 보인다.

타계

1910년 강제 합방이 되자 이교담은 해외로 망명하여 10여 년 동안 표랑하다가 1919년에 귀국하나 가난과 병고에 시달렸다. 이교담은 1936년 4월 3일 서울 삼청동 자택에서 향년 56세로 타계했다. 조선일보는 ‘언론계의 선배 이교담씨 장서’라는 제하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시국의 변함 ‘한일합방’과 함께 해외로 망명하여 가지고 북경, 상해, 운남 등지는 물론 남양군도 지방으로 십여 성상이나 표랑생활을 하다가 기미 후에 귀국해 가지고는 이래 가난과 병고와 싸우면서 만년에 고절을 지켜 나려온 터이라 한다.” 1999년 광복절 대한민국 정부는 구한 말 항일민족지 대한매일신보에서 이룬 애국 언론활동과 각종 항일단체에서 활동한 공훈을 인정하여 이교담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1999년 7월 16일자 사회면에 “대한매일신보 직원 항일 투쟁에도 앞장”이라는 제목으로 이교담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damien.soh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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