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임정수

임정수(林正秀)는 1876년경에 태어났다. 그가 8학년까지 공부한 것으로 보아 중학교 2학년까지 학교 공부를 한 것으로 보인다. 조국 한국을 떠나기 직전 그는 평양에 거주했고, 그의 마지막 교회는 평양 남산현 감리교회였다. 1893년 4월 제임스 홀 선교사와 김창식 목사가 평양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남산재 언덕에 교회를 세우고 본 교회를 남산현교회로 불렀다. 미국 북장로교가 세운 장대현교회와 견줄 미국 북감리교가 세운 평양 최초교회다. 1896년 부임한 윌리암 A. 노블 선교사가 1903년에 150평의 규모에 1,000명이 앉을 수 있는 남산현 감리교회를 신축하였을 때 임정수는 권사였다.

하와이

미국 북감리교 조선연회 선교부는 평양 남산현교회의 임정수 권사를 하와이에 선교사로 파송한다. 27세의 임정수(Chung Soo Im)는 19세의 아내 임메블과 함께 콥틱 호에 기대여 1903년 10월 15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1905년 12월 27일부터 31일까지 개최한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지방연회는 임정수를 오아후 섬의 카후쿠와 와이알루아로 파송하였다. 이후 임정수의 영어이름이 Chung Soo Im에서 Chung Soo Lim으로 변경된다. 카후쿠 교회는 1903년에 조직되었는데 1904년 말 교인 수는 37명이었다. 본 교회는 오늘날 외국인교회가 되었다. 박은배의 “새로운 사람들”에 따르면 와이알루아 교회는 1904년 현재 남자 71명과 여자 16명, 그리고 자녀 5명 등 92명의 교인이 있었다. 농장의 107명 가운데 대부분이 교인이었던 셈이다.

임정수는 1907년에는 파송을 받지 않았는데 1908년에 다시 오아후 섬의 와이파후와 와히아와로 파송된다. 1908년에 그는 교사로도 임명되었는데 민찬호, 이지성, 김T.S. 그리고 매미 H. 와드만과 J.C. 이윙 등 2명의 외국인과 더불어 사역하였다. 그는 1909년 이후 파송을 받지 않았음으로 그가 사역한 총 기간은 2년으로 보면 되겠다. 교회 사역을 하던 기간이었던 1906년 12월 2일에 임정수는 민찬호와 이내수 등과 함께 하와이에서 하와이 교포의 자치, 민족의식의 고취, 생활의 개선, 전통문화의 수호 유지를 목적한 공진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그의 민족 운동은 빼어났다. 1907년 9월 2일 하와이의 24개 한인단체 대표 30명이 호놀룰루에 모여 한인합성협회를 조직하고 조국의 국권광복을 후원하고 재류 동포의 안녕을 보장하며 교육 사업을 증진하는 등 3개조의 목적을 통과시켰을 때 임정수는 정명원과 함께 총회장으로 선출됐다. 1909년 2월 재미 한인의 조국광복 운동을 목적한 국민회가 창립될 때 임정수가 하와이지방 총회장으로 선출된다. 창립 축하식이 있던 날 하와이에서는 전체 동포가 휴업하고 한인의 집집마다 태극기를 달았고, 1천여 명 동포가 호놀룰루에 모여 경축할 때 각 농장과 관청에서 이날을 한인의 경절로 인정하였고, 하와이 정부에서 총독대리와 여러 관리가 축하식에 참석하였다. 임정수의 나라 사랑은 교회 사역을 그만둔 후에도 계속된다. 1911년 임정수는 신흥균, 박종수, 김유호, 이내수, 임봉안, 이재연, 유동면과 더불어 호놀룰루 학생양성소 발기에 동참했다. 이듬 해 대한인국민회 총무를 맡은 그는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로스앤젤레스

임정수가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면서도 민족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1918년 이전, 서학빈, 정극수, 김해석, 이학현, 김태진, 안상학, 한봉석, 유지암, 이영수, 강영각, 그리고 김경순과 함께 북미한인국어창가 발간회를 조직하고 ‘집생각,’ ‘혼인에 쓸 노래,’ ‘노인이 어렸을 때를 생각,’ ‘애정,’ 그리고 ‘파풀라 노래’ 등 5곡을 모집했다. 1919년에는 임정수가 국민회 로스앤젤레스 지방회 부회장으로 당시 지방회 회장 박재형을 보필하며 활동했다.

샌프란시스코

임정수는 1921년경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황보정걸이 하던 프레싱팔라 사업을 매득하고 영업을 하게 된다. 그런데 1923년 12월에는 그가 장래 흥왕의 희망이 많다는 생각에 양요리 사업을 시작했는데 1925년 9월에는 본 사업을 전매하고 있다. 임정수의 민족운동은 샌프란시스코에서도 계속된다. 그는 1922년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1923년 6월 21일자 신한민보는 임정수와 그의 부인 임메블의 훈훈한 마음을 소개한다. 그들은 하와이에 거주할 때 부모 없는 아이들을 많이 수양하였다는데 시애틀에 거주하는 부인 없는 김원호가 홀로 사는 처지에 그의 7세 난 ‘둘아이나’를 양육할 수 없는 딱한 사정을 듣고 ‘둘아이나’를 입양했다.

로스앤젤레스

임정수는 로스앤젤레스로 다시 이주하였다. 1931년 5월의 신한민보는 그가 선우란과 동업한 서양 요리점을 보도하였고, 1935년 12월에는 양복세탁업을 신설한 것으로 보아 그가 이곳에서도 사업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26년 9월 나성 남감리교회가 조직될 때 임정수는 평신도 대표로 선임되었는데 담임목사에는 한승곤 목사가 지명되었으며, 유사에 김성권, 황성택, 박재형, 이영수가 선정되었고, 주일학교 교장에 박경신이 선정되었다. 임정수의 부인 임메블은 1932년 본 교회 산하 나성여자청년회의 재무로 섬겼다. 임정수의 민족운동은 로스앤젤레스에서 계속된다. 임정수는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대한인 국민회 로스앤젤레스 지방회 집행위원장으로 활약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그가 눈병으로 안력을 쓰기가 어려운 가운데 자신의 사업에 힘쓰면서도 집행위원장으로 변함없이 시무함을 신한민보는 “그 정형을 아는 이는 자못 고맙게 여기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1939년 2월 태극기 장하에 열린 대한인국민회 창립 30주년 기념식은 ‘대한민족 만세“를 삼창으로 제1식 기념식을 마친 후 다과회를 하였고, 이후 제2식으로 희락회가 있었다. 그런데 중국 국민당 나성 본부의 축사가 있었는데 이는 임정수의 인덕으로 돌려도 될 일이다. 그의 민족사랑은 로스앤젤레스 삼일국어학교 의연금이나 쿠바의 맛단사스 동포 구제의연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1941년 이후 임정수의 광복군 후원금이나 독립자금이 매달 지속되는 것으로 신한민보를 통하여 확인하면서 그의 민족운동은 직위를 떠나서도 능동적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애족장

임정수는 민족운동의 요람인 평양 남산현 감리교회 출신답게 미국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 제71주년 광복절을 계기로 한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임메블

임정수의 부인 임메블의 메블은 세례명이었고, 한국어 이름은 임화연이었다. 임메블은 1884년경에 태어나 평양에서 거주했는데 임정수와 결혼하여 19세였던 1903년에 하와이로 이주했다. 임메블은 1919년 3월 로스앤젤레스에서 부인친애회가 조직될 때 회장으로 선임되어 동포간의 친애 장려, 사회사업과 교회 사업 후원, 가정 일용사물에 일화 배척 및 독립운동 후원을 추구했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은 식사에 고기 없는 날로 정하고 수요일은 간장 없는 날로 정하여 식료품을 절약하고 가용을 절약하여 식구마다 독립운동 후원금을 보내기로 결의하고 앞장섰다. 1919년 8월 미주 지역 한인 여성단체가 통합한 ‘대한여자애국단’ 조직에 임메블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조국 독립운동, 가정 일용사물을 절약하여 독립운동 후원금 마련, 국내 동포 구제 사업, 가정에서 일화 배척 그리고 부녀동포 독립사상 고취를 추진했다. 임메블은 1930년부터 1936년까지 그리고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이로써 남편 임정수와 더불어 2016년 제71주년 광복절을 계기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기에 충분했다. damien.soh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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