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최진태

손상웅 목사 (SEED선교회 연구실장)

최진태(崔鎭泰)는 1872년경에 한국에서 태어나 서울 정동에서 살았다. 그래서 그가 정동감리교회에 출석하였다고 볼 수 있는 이유다. 그런데 하와이 성공회 한인교회 설립에 관계한 것으로 보아 정동성공회교회에 출석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가 하와이로 오기 직전 마지막 한국에서 거주했던 곳은 서울의 애방정(Ai Pang Chung)이었다. 당시 1892년경 감리교인인 박엘리자벳과 결혼한 그는 네 자녀를 둔 가장이었다.

하와이

재한 미국북감리교 선교부가 9명의 한인 전도사를 하와이에 파송할 때 최진태도 파송 받는다. 최진태(Choi Chin Tai)는 1904년 5월 20일에 가족은 한국에 두고 홀로 ‘시베리아’ 선박에 몸을 싣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1904년 8월과 9월 중 최진태가 하와이를 6주 방문한 내한 미국북감리교 파송 윌리암 A. 노블 선교사를 가까이에서 만나 3개월 전에 떠나온 고국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한인 성공회

최진태는 1905년 정현구와 김익성 등과 함께 성공회 감독 헨리 B. 레스태릭을 찾아가 한인 성공회교회를 세우도록 부탁했다. 감독 레스태릭은 최진태가 성격으로나 지적으로나 유능한 지도자로 판단하여 그를 ‘교리인’(Catechist)으로 임명한다. 그런데 최진태가 1904년에 자원하여 성공회의 ‘교리인’이 되었고, 세인트 엘리자벳 성공회교회의 W.E. 포트윈 신부를 만났다는 기록도 있다. 한인성공회는 1905년 2월 20일 백인으로 조직된 호놀룰루 세인트 앤드류스 교당에서 설립되었다.

코할라, 엘리엘리 및 콜로아

1905년 12월 27일부터 31일까지 개최한 제1회 미국북감리교 하와이 지방연회는 최진태를 하와이 섬의 코할라로 파송한다. 그는 1907년까지 2년간 이곳에서 사역하였다. 그가 코할라로 임명받던 해인 1905년 8월, 모 지방신문은 이곳에 범죄가 많은 곳으로 보도했음으로 한인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그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을 것으로 본다. 최진태는 1907년에는 카우아이 섬의 엘리엘리와 콜로아에 임시목사로 파송되었다. 그 해 11월, 그는 엘리엘리에서 한인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육영학교를 설립하는 공을 세웠다.

힐로와 올라아 그리고 하카라우

1908년, 최진태는 하와이 섬의 힐로와 올라아로 임명되었고, 1909년까지 2년간 섬겼다. 이곳은 교통이 불편하고 광대한 지역이라 순회목회를 할 수밖에 없었다. 올라아는 파할라와 호노카와 더불어 강하고 활발한 교회였다. 1908년에는 김봉K와 박화T 등 두 명의 권사가, 그리고 1909년에는 김창S와 박화B 등의 두 명의 권사가 최진태와 동역했다. 1908년 현재 올라아교회는 42명의 학습교인, 24명의 정교인, 2명의 유아세례 교인, 27명의 세례교인이 있었고, 2개 처의 주일학교에 14명의 교사가 130명의 주일학교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본 교회의 교회 재산은 250불에 달했다. 그런데 다음 해에는 한인 노동자의 이동으로 교세가 저조하였는데 34명의 학습교인, 13명의 정교인, 8명의 세례교인이 있었고 3개 처의 총 30명의 주일학교 학생을 5명의 교사가 담당을 했다. 최진태는 1909년, 하와이 섬의 하카라우에도 파송되었다. 1909년 3월 현재 본 교회는 4명의 학습교인, 6명의 정교인, 19명의 세례교인이 있었고, 1개 처의 주일학교 학생 21명을 위하여 8명의 교사와 직원이 수고했다. 1909년 그는 2년차 예비 목사였고, 김최S 권사가 그의 목회를 협력했다.

최진태는 힐로 한인소학교를 운영했다. 본 학교는 1907년 4월에 설립되었음으로 최진태가 이곳에 부임하기 1년 전이었다. 1906년 5월에 올라아 농장에서 공덕화와 신판석 등의 발기로 조직된 혈성단이 1907년 9월에 하와이 24개 단체 대표자와 더불어 결성한 ‘한인합성협회’에서 최진태도 관여했을 것이다. 하카라우가 조직한 ‘동회’도 위의 ‘한인합성협회’에 가입하였음으로 ‘한인합성협회’의 하카라우 지부에서도 최진태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최진태는 1908년 미국북감리교 하와이연회 산하의 ‘성경 및 소책자’ 위원회에 배속 받아 일본인 E. 토키마사와 한국인 이경직과 함께 섬겼다. 본회는 전해에 비해 상당한 효과를 생산했고, 조셉 H. 리차드스 부인이 쓴 “와 보라”가 영어와 일본어로 번역되어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권장했는데 안타깝게도 한국어로는 번역이 되지 않았다. 본 위원회는 1909년에 한국에서 성경과 소책자를 수입하여 판매할 계획을 하였고, 한국에서 구약 성경이 출판될 것을 크게 기대하였다.

호노카아, 쿠쿠이하엘리, 파파아로아

최진태의 1910년 사역지는 하와이 섬의 하노카아, 쿠쿠이하엘리 그리고 파파아로아다. 파파아로아에는 이미 예배당이 있었다. 1910년 하와이 인구조사에 따르면 최징태(Choi Ching Tai)로 기록된 그는 이곳에서 거주하면서 하노카아와 쿠쿠이하엘리까지 순회목회를 했다. 본 인구조사를 통하여 최진태가 1904년에 하와이로 이주하였고, 37세의 기혼자인 그가 교회 목사로 활동하고 있음도 추가로 알게 된다. 호노카아는 항일운동과 일화배척을 추진한 ‘동회’가 결성된 곳으로 본 동회가 1907년 9월에 결성된 ‘한인합성협회’에 통합되었음으로 최진태도 본 ‘한인합성협회’에서 활동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1910년 3월 20일에 하와이 지방연회에서 이경직, 홍치범, 김영식, 김유순 등 5명이 목사 안수를 받을 때 최진태는 그는 그의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스프렉켈스빌

최진태는 1911년에는 마우이 섬의 스프렉켈스빌로 그의 임지를 옮겼다. 그는 1912년까지 2년간 이곳에서 목회했다. 이곳은 홍치범이 목회했던 교회로 이미 예배당이 있었다.

소천

최진태의 부인 최엘리자벳은 1912년에 네 명의 딸과 함께 1904년에 혼자 하와이로 온 남편 최진태와 합류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몄다. 그런데 최진태는 1913년 마우이 섬의 스프렉켈스빌에서 소천했다. 향년 41세였다. 가족과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지 1년이 되던 때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박엘리자벳

최엘리자벳은 최진태의 사후 본인의 성을 되찾아 박엘리자벳으로 불렸다. 그녀는 호놀룰루로 이주하여 1914년에 이승만이 시작한 한인중앙학교 여학생 기숙사 사감으로 활동했다. 박엘리자벳의 구국운동은 1913년 4월 기존의 4개의 여성단체가 통합하여 하와이 호놀룰루에 ‘대한부인회’가 결성될 때 발기인 중 한 사람이 되었을 때부터다. 그녀는 본 기관이 추구하는 자녀의 국어 교육 장려, 가정 일용사물의 일화 배척, 교회와 사회단체 후원 및 재난 동포 구제 노력을 꽤했다. 본회가 카우아이 섬 콜로아에 첫 지부를 설치할 때 1907년에 그곳에서 목회한 남편 최진태의 인맥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 해 9월부터 전도위원이 되어 그녀는 조매륜과 더불어 전도에도 열심이었다. 그 후 ‘부인구제회’와 ‘동지회’에도 크게 활동하였는데 그녀가 독립유공자로 추서될 만했다. 박엘리자벳은 1919년 이승만의 소개로 국민회 회장이었던 안현경과 재혼했다. damien.soh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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