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목사님, 저는 성경공부 리더입니다. 어떤 분이 찬송가를 부를 때에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라고 부르는 것을 불러서는 안 된다고 비판하시는데요. 그것이 맞는지요? 그 분은 이미 믿는 성도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시기에 성령님이 강림하사 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인데요? 이미 오신 그분은 다시 오시지 않는지? 알고 싶습니다.
- 팔로스 버디스 김 권사
A: 이 문제는 성령론에 있어 오랜 세월동안 신학자들 간에도 많은 논쟁을 벌이는 “성령강림의 단회성”에 대한 매우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러나 실제적 신앙생활을 위해서 반드시 명쾌한 대답을 주어야 할 중요한 질문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나 안토니 후크마(Anthony Hoekma) 같은 교수는 이미 오셨고 우리와 함께 계신 성령님은 다시 오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Tarrying meeting”(성령강림을 위해 기도하며 기다리는 집회-소위 성령대망회)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카이퍼 교수는 단순히 수도시설의 예화를 들면서 로테르담(화란의 유명한 국제도시) 시에 옛 도시와 새 도시가 있는데 동일한 수원지에서 수도관을 통해 수도시설을 하되 옛 도시에 단회적으로 수도 문을 열어 전적으로 물을 공급하고 그 후에는 옛 도시로부터 새 도시로 물이 흘러 넘쳐흐르게 해야 한다. 옛 도시에 공급된 물은 단지 유출된 것이다(Uitvoleisel-화란어로 넘쳐흐른다는 말) 라고 설명했습니다.
오순절성령강림과 같은 역사적 사실은 예수님의 성탄처럼 다시 되풀이 될 수 없습니다. 보혜사 성령이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불의 혀같이 갈라져 각사람 위에 특히 사도들에게 임하시므로 여러 지방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의미에서 단회적입니다. 그러나 한번 오신 셩령님은 다시 오실 수 없는 분인가? 문제의 요점이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이 문제에 대해 과거 총신 신대원 조직신학 교수였던 차영배 박사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편재성에 호소하여 “이미 성령이 계신 곳에는 다시 올수 없다”고 하는 수도관식 성령의 수평적 유출설은 모순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차영배 박사는 그의 ‘성령론’ 책에서 “이미 오신 분도 다시 오신다. 환언하면 성령은 사도들 속에도 교회 안에 내주하시는 동시에 다시 오신다. 카이퍼는 성령이 오순절에 다 부은바 되었다(Uitsotring)고 강조하지만 오순절의 성령은 소낙비처럼 부어졌지만 하늘은 여전히 충만하다. 보좌 앞에 일곱 영이 계신 하늘은 빈곤하지 않다(계4:5). 온 교회를 날마다 충만케 하실 능력은 충분히 있다. 그 분은 우리 속에 내주하시면서도 초월하시고 오신 후에도 목마를 때 다시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차 박사의 말에 개인적으로 동의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는 이미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그들과 함께 내주하셨지만 그들은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했을 때에 빌기를 다하자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시 성령충만함을 받았습니다(행4:31). 성령은 기도의 응답으로 다시 오십니다(눅11:13). 그래서 클라스 스킬더는 오순절에 관해 설교할 때 “오, 20세기 인생들아 너희는 성령이 위에서 오시는 것을 믿지 않는구나”라며 “골방에 가서 기도하라 그러면 거기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임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속에 계신다고 또 임재하면 안 되는 것인가? 성령님의 강림을 다시 간구하면 안 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피조물의 3차원의 제한적인 시각이나 신학적 이론을 가지고 무소부재하신 성령님을 장소적으로 제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령론에 대해 겸손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이미 오셨고 내 마음에 내재하시고 또 지금도 구하면 오십니다. 구하는 자에게 응답하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러니 그 찬송을 마음껏 부르며 성령님을 환영하고 인정하고 앙망하십시오.
빛과 소금의 교회 이정현 목사 310)749-0577 / E-mail: TLspc0316@gmail. com
04.02.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