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저는 조용한 장로교회를 다니다가 이사하여 최근에 집 가까운 어느 교회로 옮겼는데 그 교회 담임목사님은 말씀도 잘 전하시지만 교인들에게 성령충만을 매우 강조하는 목사님 같다고 느껴집니다. 이미 예수 믿는 사람은 성령이 우리 속에 내주하는데 왜 또 성령충만이 필요한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코로나에서 김 집사
A: 좋은 질문입니다. 성령충만은 아무리 강조해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은 다른 말로 예수충만이요 내 중심에 예수님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강원도 예수원에서 사역하셨던 대천덕 목사님은 할아버지가 R. A. Torrey라는 유명한 목사님이셨습니다. 이 토레이 목사님은 늘 성령충만을 강조하셨던 분이십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를 성령충만하게 도와주십시오. 왜냐하면 성령충만하지 아니하면 나는 너무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제가 성령충만하다고 느끼지 못할 때는 함부로 말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성령충만하지 않을 때 말하면 실언이 되기 쉽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제가 성령충만하지 않을 때 제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저의 결정은 잘못될 가능성이 항상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고백은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부패한 죄성이 우리 안에 있기에 우리는 죄악에 늘 노출되어 있습니다. 성령충만으로 무장 받아야 승리하고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18에는 “Be filled with the Spirit”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이 말씀을 헬라 원어를 통해 깊이 묵상해보면 4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명령형으로 되어있습니다. 명령은 순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성령충만하지 않고 신앙생활하겠다는 것은 전쟁터에 총칼 무장 없이 맨 주먹으로 무장한 적과 싸우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2)복수형으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사람인 목사나 선교사, 전도사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성령충만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3)수동태로 되어있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것은 내가 성령님을 붙잡아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보다 더 높은 인격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은 내가 붙잡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성령님께 붙잡히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님의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충만하게 사로잡으시는 것입니다. 슬픔이 가득한 사람은 자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슬픔의 감정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분노가 가득 찬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전적으로 분노의 감정의 지배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성령님께서 지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4)현재형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형은 계속 용법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7장의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것은 계속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성령충만이라는 말은 계속 성령에 의해 충만되어져야함을 의미합니다.
지난날에 아무리 부자였던들 지금 빈털털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옛날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았다는 힘이 있었어도 지금 몸이 허약하고 골골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문제는 지금이 중요합니다. 지금 이 시간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왜? 나는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자동차의 개스를 일주일에 한 번 정도씩 “fill it up”하여 계속해서 충만히 주입해야 하듯이 계속 성령충만을 구하여 성령의 재충만, 재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12.18.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