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젠돌프, 헤른후트에서 공동체 만들어 연속기도

이정현 목사

Q: 세계 개신교회의 선교시초를 말할 때 주로 18세기 말 윌리암 케리의 인도 선교를 보통 말하는데 우리 교회에 오신 부흥강사님의 설교에서는 독일의 모라비안들이 오히려 개신교의 선교 시초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맞는지요? 그리고 모라비안이 어떻게 그렇게 선교할 수 있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하버에서 이희은

 

A: 개신교 선교의 시초는 18세기 말 윌리엄 케리(William Carey)를 인도로 파송한 영국 교회를 개신교 선교의 시작으로 봅니다. 그러나 질문한 것처럼 독일의 모라비안들이 오히려 50년 전에 100명의 해외 선교사를 파송했다는 것을 선교의 시초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한 역사적 근거입니다. 다만 모라비안 공동체인 이 단체는 너무 작아서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했을 뿐입니다.

최초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2명의 젊은 형제들이었는데 인도 서쪽의 섬에 복음을 전하러 갈 때 노예가 되어 팔려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섬에서 선교사는 받아 주지 않고 노예만 받아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라비안의 지도자인 진젠돌프는 1732년(1727년 ‘골든 서머’ 부흥) 레온 하르드 도버(Leonhard Dober)와 다비드 니츠만(David Nitschmann)을 서인도로 파송하였고, 이듬해 크리스티안 다비드(Christian David)를 파송하는 한편, 독일 남부와 동서, 스위스, 네덜란드, 영국, 덴마크, 발트해 연안의 나라들, 아프리카의 골드코스트, 남아프리카 등지 등 러시아, 북미와 서인도를 비롯한 전 세계로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진젠돌프는 선교지를 직접 다니면서 해외선교사를 독려했습니다.

비록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파이오니어 선교사를 파송한 것입니다. 당시 그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견뎌야 했고, 또한 그런 과정에서 많이 죽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교지에서 죽자마자 즉시로 다른 사람이 자원해서 선임 선교사를 대신해 가서 계속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모라비안 선교, 그것은 절대 꺼지지 않는 불길이었습니다. 이들의 불길은 크지는 않았지만 큰 불길을 일으키는 불쏘시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진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생명을 바치는 순교적 신앙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경건주의운동이 해외 선교를 주도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경건주의운동으로 태동된 덴마크-할레 선교회가 18세기 1세기 동안 60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반면 모라비안 공동체는 그 4배에 육박하는 226명을 파송하여 근대 선교를 주도했습니다. 

진젠돌프(Nikolaus Ludwig Reichsgraf von Zinzendorf, 1700-1760)는 개신교가 일으킨  종교개혁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으로 등장한 캐톨릭의 반 종교 개혁운동(Counter Reformation) 세력에 의해 핍박을 받아 흩어진 모라비아의 신앙인들, 후스를 따르는 보헤미아(현 체코) 모라비안 형제단들이 1722년 90명의 신도들이 난민으로 왔습니다. 그때 기독교인 인 진젠돌프는 자신의 영토인 헤른후트(‘주님의 망대’ The Lord’s watch라는 의미)에 피신해 살도록 허락했고 기독교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1727년부터 남 24명, 여 24명으로 구성된 기도모임(들)을 만들어서 두 사람이 짝을 지어 자정부터 한 팀이 한 시간씩 24시간 연속적인 기도(連禱)를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1727년에 시작한 이 기도회는 그로부터 백년 이상 지속됐으며, 기도를 시작한 때로부터 2백년 동안 모든 대륙에 수백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위업을 달성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개신교회가 본받아야 합니다.

 

09.14.2019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