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량교회에서 통회자복 기도회...3일후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정현 목사

Q: 우리 교회 목사님의 지난주 6.25구국설교에서 한국이 6.25전쟁으로 공산화 위기에 처했을 때 부산에서 일어난 목회자들의 회개기도 이후에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여 서울을 수복했다는데, 보다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토랜스에서 권 장로 

A: 공산주의자인 김일성이 소련과 중공의 지원 하에 7개 보병 사단과 1개의 기갑사단 등 도합 11만명의 군대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기습 남침하여 6.25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 날이 주일이라 전방초소는 비상경계령이 해제되어 절반 이상의 병사들이 휴가, 외박, 외출을 한 상태였습니다. 남침한 북한군은 포천과 의정부를 하루 만에 점령하고 3일 만에 서울도 함락되었습니다. 대전, 군산, 목포, 광주, 순천이 차례로 북한군에게 함락되고 8월 31일에는 미군과 국군이 대구 낙동강전선까지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이젠 남한 면적의 10%가 남아 국가의 운명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이었습니다. 다음의 내용은 고려신학교 교수인 이상규 목사의 “6.25동란 중 부산에서 있었던 회개집회”란 글을 참고한 것입니다.

피난민들이 모두 부산에 몰려들어 초만원을 이루었고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었습니다. 부산의 교회들은 피난민 천막으로 가득 찼고 예배당, 교육관 사택도 초만원을 이루었습니다. 수많은 목회자들도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피신했습니다. 그 때 한상동 목사가 시무하던 부산 초량교회에도 수많은 목사와 피난민들이 몰려들었고 부산 중앙교회에는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목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런 전란의 와중에 자연스럽게 회개와 구국기도회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구국기도회는 국난에 처한 나라를 위한 기도회였고 회개와 각성을 위한 기도회로 목회자들이 중심이 된 기도회요 평신도들도 함께 참여한 집회였습니다.  

특히 한상동 목사가 시무하는 초량교회는 회개와 구국운동의 중심지였습니다. 그 당시 경남 지사는 초량교회 양성봉 장로였는데 250명의 목회자들이 초량교회에 거쳐할 수 있도록 배려했으므로 자연스럽게 일어난 기도회였습니다. 한상동 목사는 그 당시 부산 고려신학교 교장이었던 박윤선 박사가 함께 피난민 목회자들을 위한 집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주강사는 박형룡, 김치선, 박윤선, 한상동 목사였으며 오종덕, 이학인 목사도 강사로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중심인물은 박윤선 목사였습니다. 이곳에서 집회가 개최된 때는 1950년 8월 말이었습니다. 집회는 일주일간 하되 새벽, 아침, 저녁집회로 모였고 설교자들은 대부분 6.25동란은 우리 민족과 교회가 범죄하여 일어난 하나님의 진노의 칼이라고 믿고 회개를 강조하며 회개만이 살 길이라고 외쳤습니다. 설교자들의 공통적인 인식은 신사참배의 죄와 해방후 한국교회의 대립과 분열이 전쟁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집회 때마다 통회와 회개, 자복의 역사가 일어났고 사흘째 되는 날 새벽에는 모든 교역자들이 대부분 통회자복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날 박윤선 목사도 공적으로 신사참배한 죄를 회개했습니다. 온갖 죄악들이 회개되었고 통회 자복의 역사가 일어나 1907년의 회개운동을 방불케 되었습니다. 한 주간 회개운동을 마치자 한 주간을 더 연장하여 집회가 계속되었습니다. 부산중앙교회의 기도회 역시 이 비슷한 시기에 진행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회개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자 3일후에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실시되었고 성공하여 결국은 서울을 수복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기도의 응답입니다. 그래서 로이드존스는 “인간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과 마주 하고 앉을 때 가장 위대하고 높아진다”고 했습니다. 

 

07.20.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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