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이요 훌륭한 정치가 시저는 영원한 독재 꿈꾸다 살해당해

이정현 목사

Q: 예수님 탄생시의 가이사 아구스도의 아버지가 시저라는 말을 목사님을 통해 들었습니다. 시저의 그 유명한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배후 설명과 왜 그가 원로원에서 암살당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토랜스에서 김춘경 권사 

A: 예 로마의 역사에 관한 좋은 질문입니다. 로마의 유력한 장군들은 각각 자기 휘하의 병사를 국가의 군대라기보다 자신의 사병처럼 다루어 정권을 차지하려 했습니다. 결국 3명의 장군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크라쿠스는 제 1회 삼두 정치를 했습니다. 그들은 원로원으로부터 대권을 접수하고 셋이 모여 앉아서 광대한 로마 영토를 나누었습니다.

카이사르(시저)가 갈리아(지금의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공적으로 인기가 오르자 이를 시샘한 폼페이우스는 원로원과 손잡고 카이사르를 해임하고 그 군대를 해체시키려 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의 루비콘 강 북안에 도착했습니다. 루비콘 강은 카이사르가 통치하는 갈리아와 로마의 본 영토인 이탈리아 경계를 이루는 강으로, 군대를 거느리고 남쪽의 이 강을 건너면 국법을 어긴 모반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법으로 강력히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기원전 50년 겨울 카이사르(시저)는 루비콘 강 북안에서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휘하의 군대를 해산할 것인지 아니면 로마를 공격하는 공적인 적으로 오명을 쓸 것인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군대를 해산하면 자신이 살해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자기 군단의 장병들을 다 불러 모아놓고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전우 제군”이라 부르며 로마 진격에 대한 의견을 구했고 카이사르의 장병들 전체는 이에 찬성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잠시 동안 맞은 편 강변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결심하고는 진군의 나팔을 울리게 했습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카이사르는 이렇게 소리치며 루비콘 강에 뛰어 들었습니다. 전군도 그를 따라서 일제히 강에 뛰어 들었습니다. 기원전 49년 1월의 일입니다. 일단 결심하고 나자 카이사르는 번개처럼 재빠르게 행동했습니다. 카이사르의 군이 폼페이우스의 6만의 군대를 향해 진격하자 여기저기서 군단이 합류했습니다. 로마로 진격하는 길목에 있던 도시들은 성문을 열어 그들을 환영하였습니다. 카이사르를 신처럼 떠받들었습니다. 

이탈리아 각 지역의 시민들은 보수적인 귀족들의 지배에 이미 염증이 나 있었으므로 원로원이 카이사르를 아무리 반역자로 각인시켜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카이사르는 각 군단 병사들에게 약탈행위를 일체 금지하도록 철저히 주지시켰습니다. 결국은 로마시민들은 카이사르를 환영했으며 그래서 카이사르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로마로 입성하여 시민을 안심시키고, 곡물을 풀어 로마시민에게 주었고 로마시민은 환호했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에게 인기가 좋자 원로원도 하는 수 없이 카이사르에게 독재관(임시 집정관)의 칭호를 주었습니다.

군인인 카이사르는 군인으로 명장이었고 정치가로도 훌륭했으나 그는 독재정책을 폈고 미인이요 정치색이 강한 클레오파트라의 집요한 설득으로 그가 영원한 집정관 즉 독재적 왕권을 꿈꾸다 원로원에 의해 암살을 당하고 맙니다.

 

06.01.2019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