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터성경사역원 LA 지부장
하늘소망교회 담임
월: 인생의 행복 (삼상 1:1~8) 찬 453장
에브라임 산지에 에브라임 지파 사람 엘가나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브닌나와 한나였습니다. 엘가나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후에 제물의 분깃을 한나에게는 브닌나의 두 배를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한나에게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임신하지 못하는 한나의 모습은 당시 사사시대를 살았던 모든 사람의 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많은 것을 누리며 부족한 것이 없는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실상 그들의 모습은 생명이 없는 불행한 삶을 사는 그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고발하고 계신 겁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은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등장하는 돈 많은 바보의 이야기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풍성한 소출 때문에 기뻐하며 평안하다(눅 12:19)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돈이 많아서 편안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편안을 평안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생명으로 기뻐하는 성도가 됩시다.
화: 인생의 핵심 장소 (삼상 1:9~20) 찬 543장
한나는 마음이 매우 괴롭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슬픔을 이길 수 없었고,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었습니다. 한나가 찾아간 곳은 ‘기도의 자리’였습니다. 만일,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노라는 서원을 하며 기도합니다. 한나가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제사장 엘리는 한나가 술에 취한 줄로 착각하고 한나를 꾸짖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두 가지 입니다. 첫 번째, 인생의 핵심 장소는 기도의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자리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임신하지 못하는 슬픔 때문에 찾아간 기도의 자리에서 그녀의 목적이 바뀝니다. 아들을 주신다고 할지라도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그분이 오롯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두 번째, 영적인 민감함은 직분이나 신앙생활의 기간과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영적인 시야가 흐려진 제사장 엘리와 같은 종교인이 되지 말고, 기도의 지리에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깊은 교제를 나누는 믿음의 사람이 됩시다.
수: 남다른 믿음으로 양육하는 한나 (삼상 1:19~28) 찬 575장
하나님께서 한나를 기억하시고 생각하셨습니다. 엘가나와 한나가 동침한 후에 한나는 임신했고, 때가 되어 아들을 낳아서 그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사무엘은 그때부터 하나님의 전에서 자라게 됩니다. 한나가 사무엘을 양육했던 기준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사사기 마지막에 등장하는 ‘미가의 어머니’와 사무엘상에 등장하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를 대조시키십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절’의 전형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들이 어머니의 돈을 훔쳤다고 말해도 복을 빌어줍니다. 그러나 한나의 모습은 세상 풍조에 따르지 않고 믿음으로 양육하는 ‘기도의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녀는 ‘그 부모의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부모는 하나님께로부터 위탁양육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녀들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가진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로 세워지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목: 무엇으로 기뻐할까? (삼상 2:1~11) 찬 191장
한나는 기뻐하고 즐거워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한나에게는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임신하지 못하는 한나의 태를 열어주시고 아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나의 기도를 들어보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셨기 때문에’ 그 아들로 인하여 즐거워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한나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는 ‘하나님 그분 자신’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삼상 2:1). 우리는 무엇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까? 영원한 곳에 기쁨의 이유를 두어야 우리의 기쁨이 요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그분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리 짜놓은 계획대로 하나님이 움직여주시기를 구하기보다, 상황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며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기쁨으로 따르겠다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금: 큰 죄 (삼상 2:12~17) 찬 255장
제사장 엘리에게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입니다. 그 두 아들은 행실이 나쁩니다. 행실이 나쁜 이유를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경외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멸시했다(had no regard for the LORD)고 표현합니다. 그들은 백성이 제사를 드리고 고기를 삶을 때에 솥에 갈고리를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을 무조건 자기들의 몫으로 취하였고, 제물의 기름을 태워 여호와께 바치기도 전에 제사장 직분을 이용하여 고기를 강탈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하나님보다 먼저 취했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높이는 오만과 교만에서 비롯된 죄악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멸시한다는 것은 업신여기거나 혹은 낮잡아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의 뜻은 ‘주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인님’이라고 불렀다면, 주인으로서의 모든 결정 권한도 드려야 합니다.
토: 민감해야 합니다 (삼상 3:1~4) 찬 267장
홉니와 비느하스와는 대조되는 사무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을 섬길 당시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사장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합니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져서 잘 보지 못한다는 것은 엘리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할 지도자가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행히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소망이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 소망은 사무엘입니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고,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사무엘은 영적으로 민감하게 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깨어 있던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 온 나라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깨어 있는 성도가 되어,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각 공동체로 흘러가길 원합니다.
09.24.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