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가정예배

2007년 7월 2일 - 7월 7일

권영국 목사 (대흥교회) [월] 침묵의 시간을 가지신 예수(막6:45-56) 예수님은 많은 군중들의 갈채와 환호가 있을 때 오히려 더욱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맞이하는 삶의 위기는 사실 실패했을 때가 아니라, 성공했다고 생각될 때입니다. 왜 우리가 모든 일이 형통하고 인기가 있고 명성이 높아질수록 침묵해야 합니까? 첫째는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좀 억울하거나, 상대를 비판해야 할 시간에 우리는 침묵해야 합니다. 불꽃과 같은 눈동자를 가지신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침묵은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군중 속에서 자신을 찾지 않으시고, 하나님 앞에서 1:1로 고요한 침묵 속에 자신을 찾으셨습니다. 셋째는 침묵을 통해서 인내와 포기를 배우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고독할 때에 가장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화] 문화 아니면 성경(막7:1-13) 외면적으로 종교적인 활동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내면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은 문화와 성경 사이에 갈등이 생길 경우에는 믿는 자들은 성경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당시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법을 어기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부모에게 드리며 공경하고 싶지는 않고, 맞아 죽어서는 안 되는 기발한 방법이 "고르반"이라는 제도였습니다. "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으니, 내 것은 하나도 없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모를 섬기는 일을 피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사단은 문화의 탈을 쓰고 성경과 믿는 자를 침투하려고 합니다. 성경이 우선임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수] 마음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막7:14-23) 경건한 삶의 시작은 밖에서 부터가 아니라 안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표면적인 경건의 모습이었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내면의 거룩함이었습니다. 참된 순종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이지, 겉으로만 규례를 지켰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외형적 순종보다는 우리의 중심의 순종입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무릎도 꿇고 형식적으로 입술로 아멘을 외친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아닙니다.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의뢰하며 오직 순종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전체의 삶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목] 수로보니게 여인을 칭찬하시는 믿음(막7:24- 37) 예수님께서 가나안 땅을 지나시다가 귀신들린 딸을 둔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눈에는 흉악한 귀신들린 여자였지만, 어머니의 눈에는 고통을 함께 하고 싶고 목숨을 다해서라도 낫게 해주고 싶은 사랑스러운 딸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애원하기를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귀신들린 딸이 나을 수만 있다면, 자기는 개라고 불러도 좋고, 개보다 못하다고 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어떤 장애물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 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기 원하십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감동하게 하십시오.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금] 또 다시 4천명을 먹이시다(막8:1-22) 오병이어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베푼 이적이었고, 칠병이어의 기적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베푼 이적이었습니다. 두 기적의 동기를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종과 민족의 장벽을 넘어서, 영적, 육신적 배고픔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있는 것으로 풍성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 주신 특권도 축복권입니다. 롬12: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하나님의 풍성한 잔치를 원하시면, 하루하루 온 가정이 모두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삶이 됩시다. 또한 나누는 삶이 됩시다. "주라 그러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 풍성한 역사는 베풀고 나눌 때에 일어납니다. [토] 볼 수 있는 능력(막8:22-29) 오늘 말씀에 예수님께서 두 번의 시술(?)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희미하게 보여, 사람들을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이라 했고 두 번째 시도에서 완전히 보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믿는 자들의 시야가 사람들이 마치 나무토막들처럼 보이는 희미한 시야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성경은 형제를 대할 때 "주께 대하듯 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하실 때 세계인구 60억명 중의 한 명으로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