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터성경사역원 LA 지부장
하늘소망교회 담임
월:신앙인가 수단인가(창34:1-29)찬455
야곱의 아들들이 하몰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제안했던 것은 ‘혼인’이 목적이 아니었고, 할례를 받게 한 후에 거동이 불편한 그들을 다 죽이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한편 세겜은 디나를 겁탈한 후에 디나와 결혼하기 위해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하몰을 비롯한 세겜의 사람들이 할례를 받은 이유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도 자신들의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 ‘할례’라는 예식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하는 종교행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소원’이 중심이 되는 예배와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그분’이 목적이 되는 예배와 기도를 해야 합니다.
화:다시 벧엘로(창35:1-15)찬524
벧엘은 에서를 피해서 밧단아람에 살고 있는 외삼촌 라반을 찾아가던 중 노숙을 할 때 하나님을 만났던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가족들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켜주셨습니다(창35:5). 벧엘에 도착한 야곱은 그곳 이름을 ‘엘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인생을 살다가 위기의 순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인생을 살다가 위기의 순간을 만날 때 우리는 다시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찬송의 자리, 감사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정결한 예배자의 모습(창35:4)으로 하나님을 만날 때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수:이름을 고쳐서 부릅시다(창35:16-22)찬308
라헬이 아들을 낳다가 죽습니다. 라헬은 그 아기의 이름을 베노니(슬픔의 아들)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아이의 이름을 베냐민(오른손의 아들)으로 고쳐서 불렀습니다. 야곱은 상황과 환경을 기준으로 베냐민의 가치를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베냐민의 존재 그 자체 가치를 부여하고 규정했던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오른쪽’의 의미는 대부분 생명, 축복, 영광, 구원 등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영혼의 가치로 여겨야 합니다. 소유의 많고 적음, 배움의 정도 등을 기준으로 베노니라고 부르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도 그들을 바라봅시다.
목:꿈꾸는 요셉(창37:1-36)찬214
야곱은 편애가 충만한 역기능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편애했고 그의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편애했습니다. 그렇게 자란 야곱도 편애합니다. 라헬에게서 얻은 요셉을 편애합니다(창37:3). 요셉이 곡식단 열 한 개가 자신의 곡식단에 절하는 꿈,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에 대해 형제들에게 말하고 형들은 요셉을 팔았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보디발 집으로 팔려갔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큰 계획은 요셉을 통해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삶에서 경험되는 일들도 하나님의 큰 계획 속에 있음을 믿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금:유다 이야기 속 구원이야기(창38:1-30)찬548
요셉을 죽이지 말고 상인들에게 팔자고 제안했던 유다는 가나안 사람과 결혼해 세 아들을 낳았지만 둘은 죽고 유다는 그 아들을 잃고 싶지 않아 다말에게 셀라를 주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아내가 죽은 후 딤나로 올라갔다가 창녀로 변장한 다말과 동침하게 되고 다말이 임신해 쌍둥이 베레스(터지다, 파괴되다는 뜻)와 세라(바위라는 뜻)를 낳게 됩니다.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과 관련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지파를 통해서 이 땅에 오시고 오시는 이유는 유다와 같은 죄인들의 죄(세라-바위)를 파괴(베레스)하기 위함입니다. 유다와 같은 죄인인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유다)합시다.
토:임마누엘이 형통입니다(창39:1-23)찬384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간 요셉은 성실히 일했지만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뿌리침으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서도 성실하게 일합니다. 성경은 요셉이 형통했다(창39:23)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요셉은 형통한 사람이 아닙니다. 형통하다면 형제들에게 살해의 위협을 받으면 안 됩니다. 형통하다면 타국에 노예로 팔리면 안 됩니다. 형통하다면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형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형통한 사람이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창39:2,3,21,23)입니다. 임마누엘과 형통은 늘 한 구절 속에서 함께 기록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는 형통한 사람들입니다.
09.25.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