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전쟁과 노예제도...그 역사왜곡(1)

서론

 

청교도 미국 역사에 있어 비성경적 노예제도와 특히 인디언 원주민과의 대규모 전쟁을 통한 인디언 학살(?)에 대한 부분은 견해의 차이가 있지만, 분명한 것은 미국 역사의 정신적 지주로서 청교도 역사의 큰 명암이요, 치욕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추수감사절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함께 청교도의 인디언에 대한 보은의 표시로 시작됐다. 하지만 당시 청교도를 도왔던 왐파노아그족은 1977년부터 매년 11월이 오면 플리머스시에서 “죽음에 처했던 백인들을 도운 대가가 오히려 학살이었다”라며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은 잘못된 명절이다”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일부 선교사들 또한 인디언들을 그들의 땅에서 추방되고 학살한 이 잔혹한 역사에 첨병(?) 역할을 담당했다는 기록도 있다”(크리스천투데이 2007. 11. 15, 인디언 선교 어디까지 왔나?)  

랄프 윈터(Ralph D. Winter)는 “지난 3세기 동안 북미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자행된 '종족청소(Ethnic Cleansing)'는 선교사역 자체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라고 평가했다. 

한국보다 수 백년 앞서 복음을 접했던 인디언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미전도 종족으로 분류되어 있다. 그렇다. '명백한 운명론’(Manifest Destiny), 즉 ‘백인은 하나님의 섭리로 신대륙을 지배하도록 운명 지워져있다’라는 뜻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 백인 정착민과 인디언 원주민과의 정복 전쟁은 노예제도와 더불어 오늘까지 역사의 과오(?)로 남아있다. 

인디언선교, 즉 복음전파에 심각한 장애물이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민간인 신분인 청교도들이 자행(한 전쟁이 아니라 이해 당사자들인 인디언과 백인 정착민과의 전쟁이다. 

첫째, 1620년 청교도 이주 이전의 콜럼버스와 열강들과 인디언의 전쟁, 둘째, 1620년부터 1776년 미국독립 전까지는 영국 국왕의 통치를 받는 영국식민지 정부군과 인디언의 전쟁, 셋째, 1776년 이후부터는 미국 정부군과 인디언과의 전쟁이었다. 지금부터 그 진의(眞意)를 논하고자 한다.

 

1. 미국 인디언 전쟁(American Indian Wars)

 

1622년에서 1890년 사이에, 미국 백인정착민(White Man)과 미국 원주민인 아메리칸인디언 사이의 정복전쟁을 총칭하는 말이다. 초기부터 아메리칸인디언과 이주민의 다툼은 계속되고 있었지만,이민자의 증가와 함께 열강의 식민지 전쟁과 맞물리면서 대규모화되어갔으며, 북미식민지전쟁, 인종청소, 학살 등으로 표출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로 제임스타운(버지니아주 리치먼드, 1622), 피쿼트 전쟁(코네티컷, 1637), “블루리버(에브래스카, 1654), 베어리버(아이다호, 1863), 샌드크리크(콜로라도, 1864년), 와시타리버(오클라호마, 1868), 캠프 로빈슨(네브래스카, 1878), 둥디드니(사우스다코타, 1890) 등을 들 수 있다”(워드처칠, 그들이 온 이후, P.38.).

 

미국 이주 영국인 모두가 다 참 신앙의 청교도 아니야

청교도 ‘언덕위의 도시’사상은 이주 100년 만에 세속화 

 

1)미주 식민지와 열강들

1492년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 유럽인들에게 바다 건너 신천지는 ‘꿈의 땅’이었다. 신대륙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고 ‘해변가에 다이아몬드가 굴러다니고 금으로 냄비를 만든다더라’는 식의 환상만이 무성했다. 

반면 유럽의 최강국이었던 영국은 1500년대 들어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바람에 실직자가 많아지는 불황을 겪고 있었다. 자연히 스페인 제독이 발견한 신대륙에 식민지를 개척하자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당시 런던에서 한창 인기를 끌던 ‘서쪽으로!’라는 연극도 사람들을 부추겼다. 

이미 신대륙에는 스페인이 1526년, 현재 조지아 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땅에 산미겔 데 과달루페 식민지를 건설했다. 1559년 서부 플로리다에 스페인이 건설한 펜서콜라 식민지를 건설, 노스캐롤라이나 내륙에 1567년 건설한 산후안 요새는 18개월 만에 그 땅의 인디언들에게 파괴되었다. 1570년에 설립되어 이듬해에는 실패했던 아하칸 미션은 이후 버지니아로 불리게 되었다. 

‘최초의 영국 식민지’가 미국에 건설된 것은 메이플라워의 도착보다 13년이나 앞선 1607년이다. 그러나 1622년 3월, 인디언은 제임스타운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무려 347명의 정착민이 학살당한다. 이로써 신대륙에 뿌리 내리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1624년, 네덜란드인들이 현재의 맨해튼 근처에 상륙했다. 네덜란드인들은 제임스타운의 영국인들처럼 인디언을 교육하려 하지 않고 돈을 주어 이들의 땅을 사들였다. 동시에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들여와 새로운 땅의 개간을 맡겼다. 뉴욕의 맨 처음 이름은 이 네덜란드인들이 붙인 ‘뉴암스테르담’이었다. 뒤이어 1627년 퀘벡에 프랑스인들이 진출해 프랑스 식민지를 건설했다.

 

2)청교도들의 신대륙 정착과 오해

1620년 플리머스 항에 도착한 메이플라워호의 정착민들, 즉 첫 청교도 102명의 이주를 시작으로 1630년에 청교도들이 플리머스 북쪽에 있는 한 지점에 도착하여 매사추세츠 베이 영국의 식민지를 설립한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하는 것은 미국이주 영국인들이 다 참 신앙의 청교도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1632년도에는 영국 가톨릭교도들이 이민을 시작하여 메릴랜드에 정착하고, 1640년경에는 약 2만여명의 영국계 이민자들이 새로이 형성된 뉴잉글랜드에 거주하게 된다. 미국 신대륙 뉴잉글랜드에는 매우 정치적이고, 제국주의자들과 야합, 야망에 불타는 육의 사람들 즉, 청교도 정신과 신앙이 희박한 자들도 많이 정착해 있었다. 그 당시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법으로 다스리는 신정(神政, Theocracy) 정치체계를 소망했지만, 뉴잉글랜드는 엄연히 영국의 식민지로서 영국 왕의 통치와 지배를 받는 식민지였기 때문에 많은 난관이 이었다. 

그러나 청교도 이주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선을 위함'이라고 명시했다. 따라서 성도의 자격으로 도덕적 무흠, 신앙의 고백, 회심 체험을 요구하였고, 그들에게만 참정권을 주어 다스리게 함으로써 거룩한 공동체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1682년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자치권이 영국왕실에 의해 취소되면서 청교도의 ‘언덕위의 도시’ 사상은 대 내외적으로 큰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결국 이것이 청교도 미주 이주 100년도 채 안 되어서 완전 세속화(世俗化, secularization), 타락(墮落)을 가져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와 같이 청교도 지도자들이 뉴잉글랜드에 “거룩한 사회를 이룩하는데 헌신하고 있었지만 거의 시초부터 세속화가 나타났고 개인적인 청교도 경건생활에 주목할 만한 성공들이 존재했던 반면에 전체적인 사회는 이 목표가 빗나가고 있었다.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은 자신들 가운데 나타나는 타락을 슬퍼하고 있었다. 미국혁명 시기까지 청교도주의는 그 신앙적 뿌리들과는 크게 구별되는 세속화된 형태로 잔존했다. 완전무결한 청교도 성경관과 세계관 강조는 초기 과거의 일이 되었다”라고 알렌카튼(Allen Carden) 주장했다.  

kimjoyh@gmail.com

02.0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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