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 바른 곰

예의 바른 곰

엄규서 목사 (월셔크리스천교회)

어떤 지혜로운 청년이 숲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얼마 가지 않아 곰과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청년은 ‘죽은 척하면 곰이 건드리지 않는다’는 옛말이 떠올랐습니다. 청년은 그 자리에 숨을 죽이고 누워 곰이 지나가기만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청년과 마주친 곰은 세상에서 가장 예의바른 곰이었습니다. 곰은 청년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고 합니다. 누군가 만들어낸 썰렁한 이야기이지만 작금에 예의를 잃어버리고 무례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잔잔한 교훈과 깊은 생각을 자아내게 합니다.

경상도 영양이라는 곳에서 젊은 시절 목회를 하였을 때 일입니다. 먼 곳에서 교회를 출석하시는 가정이 있어 아내와 저는 그 가정을 심방을 하게 되었습니다. 젊은 내외가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얌전한 한옥집이었습니다. 저희내외는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였습니다.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인기척을 하며 문을 두드렸습니다. 안에서 점잖은 목소리로 “기다리시지요”라는 짧은 답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문이 열렸고 저희 내외는 문을 열어주시는 어르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르신은 갓에 한복을 곱게 차려 입으시고 고전 사극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저희 내외를 맞이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며느리가 잠깐 장을 보러갔으니 좀 기다리시지요. 제가 의관을 갖추느냐 좀 늦었습니다. 귀하신 어른이 오셨는데 이리로 오르시죠” 정중히 저희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툇마루에 먼저 오르시더니 저희를 향해 큰 절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너무 황송하여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이제 겨우 30대 중반인 저희 내외를 이렇게 예의를 갖추어 맞이하시다니 사양을 하여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지방에서 목회하는 동안 여러 가정을 심방하면서 다른 가정들도 손님을 예의를 갖추어 맞이하시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혹여 저희에게만 베푸는 예의인가 생각했는데 대부분의 가정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모든 손님들에게 예의를 갖추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와 같은 예의 바른 아름다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풍습이 되어져 버렸습니다. 또한 신앙인들조차 예의 없는 행실로 세인들에게 질타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에티켓(etiquette)이라는 말은 고대 프랑스어의 동사 estiquer(붙이다)에서 유래한 말인데 이는 상대방의 신분에 따라 달라지는 편지형식이라는 말에서 비롯되어 궁중의 각종 예법을 가리키는 말로 변하게 되었다는 견해입니다. 루이 14세 때 베르사유궁전에서 용변을 보는 곳을 안내하는 표지판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당시 베르사유궁전에서는 날마다 연회가 열렸는데 화장실이 없어 방문객들이 건물 구석이나 정원의 풀숲 또는 나무 밑에 용변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궁전의 정원관리인이 정원을 보호하기 위하여 용변을 보러가는 통로를 안내하는 표지판을 세웠고, 루이 14세가 이를 따르도록 명령함으로써 이를 지키는 것이 ‘예의를 지킨다’는 뜻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입니다.

에티겟이란 상대를 존중하고 경애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줄도 알고, 어렵고 힘든 일을 서로 돕는 상부상조(相扶相助)의 아름다운 생활을 하는 것이라 해석함이 맞는 것으로 사려됩니다. 에티켓의 기본은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친절한 마음에서 비롯되며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행동, 호감을 주는 행동, 상황을 잘 살펴 격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몇년전 실리콘 벨리에서 일하고 있는 기술직 사원을 위한 에티켓 교육이 있었습니다.

그 교육은 대인관계를 향상시키거나 사업의 성공을 위해 기술적 부분을 교육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업무를 보는 사원들에게 주어지는 교육은 단순한 타인과 만날 때 입는 의상예절, 식사예절, 대화법 등 기본예절이었습니다. 기본예절을 배워야 하는 그들이 한심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작금에 우리들도 대인관계에 있어 갖추어야 할 기본예절이 점점 결여되고 있음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모국여행에서 대 선배님을 모시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식사 중에 뜻하지 않게 후배목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배목사는 요즘 세상말로 잘 나가는 목회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후배는 일행과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온 것 같았습니다.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후일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유유히 가는 것이었습니다. 겸손한 인사와 안부의 말도 없이 사라지는 후배의 모습을 보며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후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롬16:2) 적어도 지도자인 우리가 영양의 어르신처럼 과한 예의가 아니더라도 기본이라도 배우겠다고 열심을 내는 실리콘 벨리의 젊은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