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는 일년에 한 번 교수들에게 말리부에 있는 수도원에서 3박4일 동안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혜택을 준다. 강의와 행정을 겸하고 있는 나로서는 주말을 이용하지 않는 한 도서관에 앉아 있을 마음의 여유가 별로 없기 때문에 일년에 한 번씩 주어지는 이 기회가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시간이다. 마침 어느 교회에서 애도에 관한 세미나를 세 번 인도해달라고 부탁해서 세미나 준비를 하기로 했다. 피정 센터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조용한 산에 자리 잡고 있어서 묵상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집중해서 연구할 시간이 주어진 것도 감사했지만 코비드 기간 동안 갇혀 지내다가 오랜만에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묵상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마음을 설레게 했다.
수도원 안에는 원형으로 된 단순한 길을 돌면서 묵상하게 되어 있는 labyrinth(미로)가 있다. 미로 기도는 오래된 순례의 관습에서 나온 것으로 삶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안식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미로로 들어갈 때는 마음의 모든 짐을 뒤로하고 하나님께 집중하며 미로를 빠져 나올 때에는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얻은 힘으로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준비된 마음으로 걸어 나오는 훈련이다.
수도원에 머무르는 동안 매일 아침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천천히 그 길을 걸었다. 첫날 아침의 미로 기도는 입구에 있는 십자가 앞에서의 짧은 기도로 시작했다. 총총걸음이 필요 없는 느긋한 마음으로 한 걸음씩 천천히 발을 떼면서 나의 믿음의 여정을 생각하였다.
믿음의 부모님 아래 성장한 것도 아닌데 어린 시절에 교회로 인도하신 것, 중학교 시절 목사님의 윤리적인 실족으로 마음에 상처가 되어 교회를 떠났던 것, 당연히 합격할 줄 알았던 고등학교 입시에 떨어지는 바람에 미션스쿨로 가면서 다시 신앙의 길로 가게 하신 것, 대학시절의 기독학생회, 그리고 정말 생각하지도 않았던 목사를 만나 결혼하게 된 것, 도미와 사별, 그 이후의 삶이 쭉 하나로 연결되면서 나의 선택인 줄로 알았던 삶의 많은 부분이 결국은 하나님의 크신 계획 아래 하나하나 이루어졌음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그 때는 기쁜 일이 아니었는데 돌아보니 그 일이 결국은 하나님 앞으로 나를 이끌었던 일들도 많았다. 이해할 수 없었던 슬픈 일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다. 복음성가 가사처럼 “크신 계획 볼 수도 없고” 제한된 나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큰 뜻이 나의 삶을 주장하고 계셨던 것이다.
“섭리”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지혜와 사랑으로 우주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돌보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말한다. 즉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연이나 운명이 아닌 완전하게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이다. 미로를 걸으며 깨달은 것은 하나님은 나의 삶의 모든 사건들을 통해 그 분이 목적한 내 삶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가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나의 삶과 나를 둘러싼 환경 속에서 최선을 향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게 되니 최근 몇 달 동안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염려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까운 친구들의 투병으로 인한 걱정과 염려, 딸의 건강 때문에 답답한 마음, 이 모든 짐을 어깨에 지고 끙끙거리며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향해 되뇌이던 나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얘야, 네 삶의 모든 부분에 관여했던 내 손길이 보이지 않니? 걱정하지 말고 나를 신뢰해라. 나는 너를 사랑하는 네 아버지다.” 미로의 끝에 다다라 십자가 앞에 서서 손바닥 위에 나의 모든 염려를 다 올려놓았다. “하나님,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주님 앞에 제가 끌어안고 있는 모든 염려를 다 내려놓습니다. 주님의 뜻은 완전하십니다”라고 말하며 손바닥 위에 올린 모든 염려를 땅을 향해 털어버렸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라고 말한 샤를 드 푸코의 말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해 몸부림치던 나에게 미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하시니 감사할 뿐이다.
lpyun@apu.edu
06.26.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