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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이응목(1875-1965)

이응목(李膺穆)은 1875년 12월 21일 또는 그해 1월 26일에 평안남도 숙천군 평리 방북삼리에서 아버지 이성심과 어머니 서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21세 되던 1896년에 장로교인이 되었고, 25세가 되던 1900년 10월 22일에 고향에서 김신환과 결혼했다. 

하와이 노동이주자로 지원한 이응목(Eung Mok Ye)은 부인 김신환과 함께 코리아 선박을 타고 1905년 4월 15일에 하와이 오카라에 도착하였고, 이곳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였다. 이듬해 1906년 2월 21일에 그는 부인과 하와이에서 태어난 아들과 함께 만추리아 선박을 이용하여 샌프란시스코(상항)로 이주했고, 그해 공립협회에 가입하였던 것으로 보아 그와 그의 가족이 상항한인감리교회에 출석했을 것이다.

이응목은 상항에서 와이오밍 락스프링스로 이동하여 석탄 채굴 광부로 일하였다. 이응목이 1907년 8월 16일자 공립신보에 게재된 ‘대한인 연합교보를 위하여 의연한 제씨의 방명’에서 한인 예배당 없이 신앙을 지킨 기독교인으로서의 자태를 잊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그 외에도 동석기, 고금자, 고상륜, 박호빈, 이휘관, 신영한, 이병권, 유홍서의 이름이 있는데 위의 명단을 볼 때 락스프링스에 예배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응목이나 그 후 감리교 목사가 된 동석기가 중심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해 6월에 공립협회에 헌의한 바는 ‘교육은 위국대요’(敎育爲國大要)였는데 이응목이 앞서고 황국일, 이동령, 고금자와 함께 그달 18일에 공립신보에 기고한 아래의 ‘위학생헌의서’(僞學生獻議書)에서 그의 애국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우락스푸링에 유하는 이응목 등은 삼가 본 총회에 의향을 올리옵나니 청컨대 각 지방회에 공포하시와 성사가 되게 하시기 바라옵나이다. 대저 옳은 줄을 알고 행치 아니하거나 할 수 있는데 하지 아니하는 것은 스스로 패망을 취함이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리오. 우리가 모이면 나라 걱정이오, 말하면 공부하여야 되겠다고 하며 부화뇌동하여 돈푼이나 만들어 가지고 수쿨뽀이를 다니면서 근근이 공부하다가 돈이 갈증하면 할 수 없어 공부를 정지하고 이곳저곳 뇌동하려 드니 이 한 달 두 달 세월을 허송하는 자로 있으며, 혹은 금전에 눈이 어두워 마음이 연하여 기위 일하기를 시작하였으니 돈이나 벌어가지고 환국하자 하며, 혹은 돈 좀 벌어 가지고 다시 학교에 간즉 그전 공부한 것을 다 잊어버렸으니 공부를 좀께 다닐만하면 돈이 없고 돈이 좀 생기면 먼저 공부한 것을 잊어버리니 학생 된 자의 마음이 얼마나 상심이 되리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하매 매우 염려할 바라. 돌아보건대 우리는 놔두면 코 재주도 없으니 다른 사람 공부하는 것이 내게 상관이 없다고 마음이 편하오리까. 우리 공립협회에서 학생을 권학하기 위하여 학생회를 조직하였으니 공부할 기초만 세우고 완전한 실효를 기약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재정이 없어서 그러함이라. 그런즉 불가불 실효의 방책을 강구치 아니할 수 없으니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 우리 몇 사람의 생각은 매 삭 1, 2달러 못되는 재정을 가지고 온전히 공부 잘 할 것을 깨달았을 것이나 이것은 백 사람이 다 학생이라. 위명하되 한 사람이 성취함만 같지 못하매 한 사람이 돈도 벌고 공부도 하려면 둘 다 성취 못할지라. 돈만 버는 자는 돈만 벌고 공부하는 자는 공부만 하는 것이 둘다 완전할 터이니 우리 몇 사람이 생각건대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학생 몇 사람을 공부시키는 것이 우리나라를 회복할 기계를 준비함이오. 본 회에 대지를 이루는 방책이라 하노이다. 이 일에 대하여 우리 네 사람은 매 삭에 오십 전씩 내기로 작정하고 여러 동지자에게 앙고하옵나니 가령 백 사람이 매 삭에 50전씩이면 50달러라. 매 삭 50달러를 가졌으면 학생 3, 4명을 공부시킬 것이오. 천 명이 합심하면 3, 40명을 교육할 터이니 우리의 말한 바와 같이 매 삭 1, 2달러 자비가지고 공부 잘하는 것과 같다 하노라. 여러분께서는 나라를 사랑하는 열성과 공부하여야 되겠다는 성심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힘써 행하여 본국 정부에서 도와주기를 바라지 말고 일본과 청국서 보내는 관비 학생보다 더욱 열심히 나게 할진저. 이 돈들은 공립협회에 총회 학무 법무로서 총괄케 하고 학생은 본회로서 공천 채용케 하고 규칙은 학무부가 규칙대로 시행하여 실시가 되게 하시기를 이에 헌의하오니 조량하심.” 

이응목의 나라 사랑은 1907년 4월에 황국일과 함께 락스프링스 지방회의 대의원과 학무로 활동하면서 야학을 운영하였고, 4명이 근실하게 출석하였음에서 알 수 있다. 그해 7월에는 이응목이 지방회 대리 회장이었다. 

 

슈피리아 한인감리교회 예배인도자

 

그 후 이응목은 가족과 함께 락스프링스에서 같은 주 슈피리아로 이동했다. 상항에서 발행되던 1909년 3월호의 ‘대도’에 따르면 슈피리아에 있는 동포 중에 지금 새로이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자가 일곱 명이 되었고, 매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대도’의 편집인 양주삼 전도사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더욱 풍성히 주어 믿음이 견고하게 되며, 또 다른 데 계신 형제들도 그와 같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의 기도의 응답이 그해 10월 ‘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해 10월에 5명이 늘어 12명이 되었고, 그들은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주 예수 앞으로 나아왔다.’ 

슈피리아 한인감리교회는 주일마다 육신의 일은 전폐하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켰다. 아침 9시부터 1시간 동안 성경공부를 하였고, 저녁 7시부터 1시간 동안 성경강론을 하였다. 삼일날 곧 수요일에는 저녁 7시부터 1시간 동안 기도회로 모였다. 위와 같이 세 번의 모임을 통해 그들은 신덕을 배양하기에 힘썼다. 성경을 공부하며 주일을 근수하고 품행이 단정하여 이곳 탄광 회사 주인과 다른 백인들이 한인을 사랑하며 공경할뿐더러 특별히 선대하여 하나님의 권능과 구주의 은혜를 감사하였다. ‘대도’를 구독하는 자 중에 그 대금을 지급한 김신우, 김창령 그리고 이응목이 있었는데 이응목이 예배를 인도했을 것이고, 김신우와 김창령은 교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삭도한인감리교회 지방 전도사

 

이응목은 부인과 함께 하와이와 와이오밍에서 낳은 두 자녀를 데리고 1910년에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삭도)로 이주했다. 그는 1913년에 대한인 국민회 삭도지방회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15년에도 삭도지방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한인에게 신망을 얻었다.

1915년 6월 26일에 회집한 캘리포니아 북방에 있는 한인 남감리교회 지방회는 지방전도사를 선정했다. 이응목을 양주은과 함께 삭도 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임명을 받았다. 이날 임정구는 오클랜드 한인감리교회로 파견되었고, 황사선은 상항한인감리교회 담임목사이면서도 삭도, 스탁톤, 오클랜드 및 마운틴 뷰의 있던 한인감리교회의 순회목사로 임명되었다. 이변이 없는 한 1910년 11월에 대한인 국민회 삭도 지방회관으로 빌린 4가 1517호에서 삭도한인감리교회가 예배를 드린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곳은 개발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전도사로 임명된 다음 달인 7월에 이응목의 부인 김신환이 치료하던 신병이 완치되지 않아 상항 악카디아 여관으로 가서 조리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해 9월에는 양금성이 신병으로 삭도 천주교회 병원에서 치료하였는데 병원비가 없어 신한민보에 병원비 후원을 이응목이 나서서 직접 광고하였다. 

 

1915년 6월 삭도 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 임명받아

삭도 지방회 법무원, 삭도 지방회 부회장으로 활동

 

그달에 삭도 뿌라더릭 합수농장에서 국치기념식이 있었다. 서울 정동 증명전 앞에서 한일합방조약이 맺어진 1910년 8월 29일을 국치일로 지정하고 국치기념식을 통해 치욕을 벗고 독립을 추구하는 날로 지켰다. 삭도 한인감리교회 교인들이 대거 참석하였고, 다음의 순서 담당자의 대부분이 교회 직원이었을 것으로 안다. 창가를 부르면서 개회하고, 지방회 회장이자 삭도 전도사인 이응목이 취지 설명을 한 후 권용복 여사가 기도하였고, 구연성과 김용성이 군가를 부른 후 임 초가 ‘망국인의 현상’이라는 제하의 연설을 하였으며, 고중명이 감동가를 불렀고, 여학생 이보배가 초례식을 담당하였으며, 목사였던 황사용이 기도하였고, 라동현과 김유성과 조동현과 김규돈과 조종익이 ‘소년 남자가’를 부른 후 방청석에서 나와 누군가 연설하고 국치기념식을 마쳤다. 이후 다과회가 있었다. 

신한민보에 1915년 10월 28일에 게재한 삭도지방회 경비를 보조한 명단 중 많은 사람이 교인이었을 것이다. 그 명단은 아래와 같았다: 김윤택, 심점록, 김규돈, 강순태, 박승구, 장석일, 나재정, 송창균, 조종익, 김국현, 김재건, 박성태, 김찬일, 유득춘, 김지선, 나재원, 권영태, 김성일, 이공렬, 박군보, 지용빈, 이도석, 정영서, 양주은, 홍 언, 안경심, 조등현, 김병숙, 장유문, 이화춘, 박춘하, 송승군, 김형필, 석화섭, 전흥문, 김응규, 신달윤, 김계선, 이옥형, 윤경호, 박 연, 박명오, 박재윤, 김성도, 홍종연, 안여선, 김성수, 김홍균, 김수권. 1915년의 보고에 따르면 삭도 한인감리교회 교인은 총 28명이었고, 출석 교인은 평균 15명이었다. 

이응목이 삭도 지방회 법무원으로 선출된 1916년에 다시 순회목사 황사용의 지도하에 삭도 전도사가 된 것 같다. 그해 삭도 한인감리교회 교인은 총 35명이었고, 평균출석은 16명이었다.

그동안 삭도에서 한인여관을 경영하던 이응목은 1917년 5월에 여관을 내놓았다. 그런데 이곳에 거주하던 김홍균에 따르면 삭도는 콜루사와 윌로우쓰 벼농장과 삭도 벨리와 스탁톤 중심에 위치하여 동포의 내왕이 많이 여관 하나가 없을 수 없다며 누구든지 여관을 경영하면 넉넉히 성공할 것이라며 이응목의 여관을 선전했다. 그해 12월에 이응목이 삭도지방회 부회장이 되었다는 광고가 게재된 신한민보에 삭도에 거주하던 김계선의 ‘사람 찾는 광고’가 났다. “김형만과 김형식 형제분은 미주에 온 지 15년인데 근 3년은 본집에 통기가 없어서 해 씨의 처자가 소식을 알아 달라 하며 김봉오 씨의 모친도 그 아들의 편부를 탐문하여 달라고 본인에게 부탁하옵기 자에 광고하오니 누구시든지 이상 3씨의 거주를 아시거던 본인에게 기별하여주오”라는 안타까운 기사에 전도사였던 이응목도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였을 것이다. 김영훈이 담임목사로 부임하던 1917년까지 이응목이 양주은과 함께 2년간 전도사로 사역하였던 것 같다.

그 후 이응목은 상항으로 이주하여 세탁소와 상점을 운영하면서 독립의연금을 많이 출연했다. 1930년과 1931년에는 이응목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가구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하와이에서 나성으로 이주한 후 미국 시민권을 신청할 때인 1954년 11월에 이응목은 에드워드 목 리(Edward Mok Lee)로 변신했다. 그는 1965년 4월 8일 향년 90세에 중가주 프레스노에서 소천했다. 국가보훈처는 2015년 8월에 그의 독립운동을 셈하여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damien.sohn@gmail.com

06.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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