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점점 더 많은 미국인이 하나님, 천사, 악마 같은 영적 존재의 실재를 부인하고 있다. 미국에서 하나님, 악마 및 기타 영적 실재에 대한 믿음이 최저점에 도달했다. 최근 갤럽 여론 조사에 따르면 하나님, 천사, 천국, 지옥 및 악마의 존재를 믿는 미국인의 비율이 2016년 이후 3-5퍼센트포인트 하락한 것이다.
그러함에도 미국인 대다수는 여전히 영적 존재를 믿고 있는데, 74퍼센트가 하나님을 믿고, 69퍼센트는 천사의 존재를 믿으며, 67퍼센트는 천국을 그리고 59퍼센트는 지옥의 존재를 믿는다. 악마의 존재를 믿는 수치는 58퍼센트였다.
2001년과 비교할 때, 가장 많이 감소한 게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믿음인데 각각 16퍼센트포인트였다. 2001년 이후 지옥에 대한 믿음도 12퍼센트포인트 떨어졌고, 악마와 천사에 대한 믿음도 각각 10퍼센트포인트씩 하락했다. 전체적으로 미국인의 51퍼센트는 다섯 가지 영적 존재를 모두 믿는다. 그 어떤 존재도 아예 믿지 않는 사람은 11퍼센트이며,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고 대답한 사람은 7퍼센트이다.
전반적으로 모든 연령대에 걸쳐서 영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감소했지만, 18-34세 연령대가 그중에서도 가장 낮았다. 가톨릭보다는 개신교인에서 믿는 비율이 더 높았고,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종교 예배에 참석하는 성인 대다수가 다섯 가지 영적 존재를 다 믿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정치 성향도 믿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공화당원의 78-87퍼센트가 다섯 가지 영적 존재를 믿는데, 무소속의 경우에는 51-68퍼센트이다. 이에 비해서, 민주당원의 56-66퍼센트가 하나님과 천사, 천국은 믿는다고 했지만, 지옥과 악마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절반 미만이었다.
무슨 의미인가: 영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감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식론적 권위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특정 주제에 관한 인식론적 권위를 인정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해당 주제에 관해서 보유하고 있는 정보나 통찰력이 신뢰할 수 있다고 인정받는다는 의미이다. 과거에 인식론적 권위는 현실에 대한 공유된 감각과 현실을 더 명확하게 이해하는 권위에 대한 존중에 크게 뿌리를 두고 있었다. 예를 들어, 새로 태어난 아기를 놓고 삼신할머니가 준 거라고 말하는 어린아이와 자기의 자궁에서 나왔다고 말하는 어머니의 두 의견이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어머니의 말을 믿었다. 아기가 어디서 오는지에 대한 현실을 어머니가 더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지식의 많은 영역에서 인식론적 권위는 여전히 지배적이다. 그러나 지금은 형이상학적 주관주의에 빠르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형이상학은 실재의 근본적인 본질에 대한 연구이고, 형이상학적 주관주의는 실재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입장이다.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조차도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우리가 실재 또는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 우리의 인식, 신념 또는 기타 주관적인 경험에 따라 구성되거나 조건화된다는 것이다. 실재라는 것이 우리의 마음과 독립해서 존재하는 “저 바깥”의 무언가가 아니라, 우리의 주관적인 경험에 따라 형성되거나 심지어 존재하게끔 되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형이상학적 주관주의는 너무도 터무니없어서 누구도 그것을 믿을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러나 낙태에 관한 1992년 대법원 사건인 가족계획연맹 대 케이시(Planned Parenthood v. Casey) 사건을 생각해보자. 그 판결에는 형이상학적 주관주의에 관해서 지금까지 발표된 내용 중에서도 가장 명확하고 영향력 있는 주장 하나가 포함되어 있다. 낙태에 대한 “권리”를 옹호하면서 케네디 판사는 다수의견에서 “자유의 중심에는 존재, 의미, 우주, 인간 생명의 신비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개념을 정의할 권리가 있다”라고 썼다.
많은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케네디도 형이상학적 주관주의가 자명하다고 가정한다. 전직 판사 케네디의 정의에 따르면, 존재의 본질(존재함), 윤리의 본질(의미), 물질세계의 본질(우주), 그리고 사고와 감정 및 행위(인간 생명의 신비) 등 기본적인 형이상학적 개념은 하나같이 개인이 정의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실재의 본질을 스스로 정의할 권리야말로 그에게 있어서는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에 필요한 기본 권리가 된다.
물론 아무리 케네디라고 해도 형이상학적 주관주의를 일관되게 적용한 적이 없다. 아니, 그건 아예 불가능하다. 그런 개념은 터무니없고, 누구라고 거기에 따라서 살 수는 없다. 케네디의 견해는 합의가 필요한 실재에 대한 부정이자 누구나 스스로 실재가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민법이 존재하고 이에 따라 대법원 판결이 가능하려면, 현실 내지 실재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가 있어야만 한다.
자기모순 없이는 누구도 일관되게 형이상학적 주관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개념상 형이상학적 주관주의 내에서 자기모순은 누군가가 동의하는 경우에만 “실재”가 된다. 따라서 얼마든지 실재 그 자체를 거부함으로 누구라도 비일관성과 모순이라는 현실을 피할 수 있다. 자기모순을 무시하고 대신에 “자기 눈에만 보이는 진실”에 의지하면 되는 것이다.
지극히 자기 모순적이고 실재의 재정의라는 형이상학적 주관주의의 대표적인 사례가 트랜스젠더 운동이다. 얼핏 보기에 이건 거의 갑자기 세상에 튀어나온 것만 같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미국인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남자도 여자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하기 시작한 게 아니다. 인식론적 권위를 거부하고 이를 내부 권위로 대체하는 데에는 무려 수십 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사람들이 “나의 진실”이라는 말에 더 이상 웃지 않게 되었을 때, 도리어 급진적인 내부 주관성을 지적 존중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발생한 게 다름 아닌 트랜스젠더 운동이다.
그렇기에 이번 갤럽 여론조사는 놀랍지 않다. 하나님, 천사, 악마, 천국, 지옥이 정말로 실재한다면(당연히 그렇다), 그 사실은 진리가 개인의 감정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생각에 실존적 위협을 가한다. 형이상학적인 주관주의가 기반을 확보함에 따라 하나님과 그 외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비례하여 감소할 것을 예상해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할까? 이 문제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은 단 하나뿐이다.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형이상학적 주관주의가 성경의 인식론적 권위와 성경의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도록 그들을 설득해야 한다.
예수님은 모든 창조의 근원이시며, 그를 통해서 천사, 귀신, 천국, 지옥 등 모든 실재가 창조되었다(골 1:16-17).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우리의 이웃이 그들의 궁금함이나 채우는 수준의 일반적인 신을 받아들이도록 노력하는 대신,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신 분을 받아들이도록 애써야 한다. 진정한 진리의 권위를 올바로 인식할 때야 우리는 비로소 주관적인 ‘나의 진실’이 얼마나 무가치한 우상인지를 똑똑히 볼 수 있게 된다.
by Joe Carter, TGC
09.30.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