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어떻게 한국에 정착했는가?
한국에 천주교를 처음으로 소개한 것은 국내 학자들이었다. 1700년대 중국에서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천국의 참 의미’를 중국어로 연구해온 현지 젊은 학자들의 모임에서 한국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1784년 한반도로 돌아와 천주교를 전파하였다.
한국에서 천주교가 성장하면서 이 신앙을 공언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도 커졌다. 18세기와 19세기 초에 박해와 순교가 시작되었으며, 1866년 대한제국의 대원군 치하에서 가장 심한 박해가 일어났다. 이후 명성왕후가 1874년 퇴위 후 외세와 조약을 맺어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기독교는 그 이후로 한국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2015년 전국 인구 통계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5분의 1은 개신교, 8%는 천주교였다.
그러나 무속신앙은 여전히 한국 사회에 널리 강력하게 퍼져 있으며, 매년 약 50,000개의 무속신앙 관련 의식이 성대하게 서울에서 열린다.
뿌리 깊은 애니미즘
무속신앙은 인간이 조상의 영혼이나 나무나 달 같은 사물 등 다양한 영혼과 교감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민속 신앙이다. 시베리아에서 시작되어 기원전 10세기 훨씬 이전부터 한국에 존재했으며, 누가 무속을 한국에 들여왔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고고학 자료를 통해 청동기 시대에 한반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무속신앙이 존재하지만, 한국의 무속신앙은 무속인들이 입는 복장, 영혼과 교류하는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혼과 소통하는 방식 등에서 독특한 차별점이 있다. 대부분의 전 세계의 무당들은 무아지경에 빠지고 영혼이 그들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과정을 통해 영혼 세계와 접촉한다. 그러나 한국의 무당들은 영혼들을 그들 안으로 “들어오도록” 초대한다.
무당이라고 부르는 여성은 굿을 하며 노래와 춤을 추어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제물을 준비한다. (박수무당이나 남성 무당도 존재하지만 주로 여성이다.)
이러한 의식을 하기 위해 무당은 장식된 화려한 무지개 무늬 의상을 입는다. 그들의 역할은 굿을 통해 아이의 이름을 고르는 것이든, 상서로운 혼례 날짜를 선택하는 것이든, 풍년을 가져오는 것이든,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사람들에게 명확한 답을 주거나 도움을 주는 것이다.
다른 세상과의 접촉
한국의 무속신앙이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세상에 수많은 영혼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한국인들의 일상생활에서 초기 선교사들은 이러한 측면을 이해했다.
헐버트는 ‘한국 민화’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영혼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서나 나타난다. 문고리나 젓가락도 한 사람의 전체 운명을 바꿀 힘이 있는 영혼이 머무는 곳일 수 있다.”
무속신앙을 통해 이러한 개념들이 이미 그들의 세계관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에게 영적인 세계의 존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기독교를 외국인이 무속신앙을 침입한 것으로 보았고, 결국 천주교와 개신교 선교사들도 무속신앙에 대해 크게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천주교 선교사들이 주로 유교와 대립했던 반면, 개신교 선교사들은 샤머니즘과 정면으로 대립하였다.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는 한국에서 무속신앙을 처음 접했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무당을 ‘우상’이라고 불렀다. 한편 동료 미국 선교사 헨리 G. 아펜젤러는 무속신앙은 단지 미신을 믿는 행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영 안에서 기도하다
1907년 평양 대부흥기는 이러한 선교사들이 무속신앙과 영적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놓았다.
1897년부터 1906년까지 한국교회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 동안 한국은 지배권을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으로 떠들썩한 정치 상황을 맞닥뜨렸다. 러일전쟁(1904~1905)은 한국을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한반도 전역으로 퍼진 평양 부흥은 이런 아픈 정치적 배경에서 비롯됐다.
이러한 전국적인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대규모 고백과 회개, 구마와 치유, 격렬한 단체 기도 등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신자들은 큰 소리로 우는 경우가 많았다.
“모든 청중들이 함께 크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는 혼란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함성과 영성의 조화되고 거부할 수 없는 기도가 쏟아져나와 감동받은 이들이 함께 어우러진 모습이었다” 라고 미국 선교사 윌리엄 블레어는 말했다.
이러한 부흥회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의 영적 세계를 인식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때 구마나 치유 사역에 극도로 비판적이었던 일부 선교사들이 부흥회를 통해 태도를 바꿨다고 역사학자 옥성득이 기록했다.
많은 선교사들이 중단주의적 견해를 버리고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증언했다. 그들은 한국의 전통적인 영적 세계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개신교가 한국에서 정착하는 데 무속신앙의 역할을 인정하게 되었다.
미국 선교사 찰스 A 클라크는 “ 1900년 전처럼 사탄이 이제 이곳에서 하나님과 대립하여 영적 활동을 방해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고 말했다.
02.18.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