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과녁인가 통로인가?

베이징 동계 올림픽이 한창이다. 판정 시비 등이 일어 다소 얼룩진 모습이지만 오는 20일까지 여러 종목이 계속된다. 그 여러 종목 가운데 봅슬레이라는 종목이 있다. 특별히 제작된 원통 형태의 썰매를 타고 길고 좁고 구불구불한 얼음 통로를 질주하는 경기이다. 둘이나 넷이서 함께 경주를 펼치지만 여성 혼자 경주하는 모노봅도 있다. 혼자든 함께든 그들은 얼음길이 좁다고, 험하다고, 멈추지 않는다. 통로가 끝날 때까지 달리고 또 달린다. 하계 올림픽 가운데 양궁이 있다. 양궁도 개인전이 있고 단체전이 있다. 양궁에는 과녁이 있다. 과녁은 얼마나 아플까. 계속 날아오는 화살을 맞고 견디기가 얼마나 힘들까.

인생에는 이같이 과녁인생이 있고 통로인생이 있다. 과녁인생은 온갖 화살을 맞고 비틀거리는 인생이다. 지나갈 만한 말 한마디도 가슴에 꽂아 놓고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과녁처럼 닫힌 인생이요 막힌 사람이다. 보는 이도 힘든데 정작 본인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통로인생은 그렇지 않다. 자기에게 쏟아지는 부정적인 이야기는 다 지나 보낸다. 자기의 아픈 과거를 들추는 사람에게 “그게 어때서?” 라고 반문하면서 스스로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는다. 그 통로를 통해 자기의 나쁜 것도 흘려보내지만 온갖 좋은 것도 다른 이들에게 흘려보낸다. 열린 인생이다. 본인도 신나고 보는 이도 시원하다.

지난 1월에 중국어 회중예배가 시작된 지 7주년 감사예배가 있었다. 예배 가운에 세 명의 중국인 여성이 댄싱으로 하나님께 찬양하는 시간이 있었다. 세 명의 여성은 다름 아닌 항상 밝게 웃는 집사님과 그의 두 딸이었다. 집사님의 남편은 암이 전이되어 힘겨운 상황인데도 꿋꿋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그런데 그날 길지 않은 연주 가운데 집사님이 몇 차례 넘어질 듯하였다. 그때마다 집사님은 더 밝은 미소로 일어섰다. 필자는 연주하는 공간이 좁아서 넘어지는 줄로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뒤 알게 되었다. 남편을 돌보느라 늘 잠이 부족하고 자녀를 홀로 키우느라 늘 힘겨운 집사님의 다리에 근육무력증 같은 증상이 자주 찾아온다는 사실을. 그래도 그는 늘 웃고 있고 늘 감사하고 늘 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날도 서 있기도 힘든 데 정성을 다해 딸들과 준비한 춤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여러 고통으로 신음하는 과녁인생이 아니라 모든 것을 흘려보내고 감사하는 통로인생이다. 

예수님은 닫힌 인생에게 “에바다(열려라)!” 하셨다. 닫힌 인생들에게 열린 인생으로 살라고 하신다. 그렇다. 화살 맞은 과녁처럼 비틀거리는 인생으로 살고 싶지 않다. 과녁처럼 닫힌 인생이 아니라 통로처럼 열린 인생으로 살고 싶다. 지나가리라. 온갖 화살은 지나가리라. 통로가 되어 모든 것을 흘려보내고 싶다. 그 통로는 아픔과 상처를 흘려보내는 것만이 아닌 받은 축복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길 원한다. 잊히지 않는 말이 있다. “God blesses you to bless others.” 무슨 말인가. 과녁인생이 이니라 통로인생이 되라는 말이 아닌가. “하나님은 다른 자들에게 복을 나누라고 당신에게 복을 주신다.” 그대, 과녁인가 통로인가?

02.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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