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역사 속의 선교적 진앙지(1)

송종록 목사

(크로스 선교전략 연구소)

 

묶은 고목나무에서 새싹이 나올 수 있을까? 어렵다. 새싹은 새로운 토양에서 씨가 발아할 때 가능하다. 지나간 2000년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성령의 촛대는 늘 고착된 틀을 거부해왔다. 중세 천년의 암흑기에서 교회는 쇠락했다. 1517년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교회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것의 핵심은 이신칭의, 만인제사장 그리고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보편성이다. 즉, 사제와 교회의 손에만 있던 말씀을 빼앗아 모든 이에게로 주어진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개혁교회는 생명수와도 같이 성경의 진리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으로 교회는 또 다시 생명력을 잃어가게 되었다. 일반적인 경향은 종교생활의 형식화, 교회화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고 있었다. 소위 “사멸된 정통”의 종교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류의 중심지는 독일이었다. 이유인즉, 30년 전쟁과 자연신론(Deism), 계몽주위, 유물론 등의 근세 철학의 영향이 컸다. 따라서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경건주의(Pietism) 운동은 바로 스콜라적인 경향에서 결별해 나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험과 감정의 중요시 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평신도들 역시 신앙의 건설적 생활을 위해 적극적인 관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의 인물은 스페너로 시작하여 프랑케를 거쳐 진젠돌프 백작으로 이어졌다. 그 때와 영적인 정황이 유사한 오늘의 시대에 신적 통치를 향한 새로운 돌파구는 무엇인가?

스페너와 경건주의 운동

이 운동은 17세기 후반기부터 독일 루터파 교회를 배경으로 일어났다. 주창자는 스페너(Philip Jacab Spener, 1635-1705년)였다. 그는 어려서 신앙이 두터운 부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그는 스트라스버그 대학의 유학시절부터 경건한 생활에 힘쓰며 스승들의 영적인 감화를 크게 받았다. 그는 안드트(John Arndt)가 쓴 “진정한 기독교”를 읽고 크게 감화를 받았다. 이 책은 신학자들로 하여금 지나친 교리논쟁에서 돌이켜 사랑과 교제를 힘쓰고 신앙고백에서 참 신앙생활로 돌아올 것을 권하고 있었다.

스페너는 후에 “경건한 열망(Pia Desideria)”이란 책을 집필하였다. 그는 이 책으로 일약 경건주의 창시자로 인정받게 됐다. 이 책의 특색은 “경건 생활을 위한 성경연구, 교리적 논쟁의 회피, 회개와 인격적 신앙의 강조, 교회 안에 핵심체의 인정, 독립적 평신도 운동” 등이었다. 이 5가지 특색들 중 경건주의 운동이 교회사적으로 가장 공헌한 것이 있다면 평신도운동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사제 중심의 중세교회 제도에서 많은 개혁들이 있었으나 만인제사장 교리에 입각하여 평신도들이 교회발전에 참여하게 되는 운동이 뚜렷이 나타났다.

프랑케와 할레대학

스페너에 이어 경건주의 운동을 이끈 지도자는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년)였다. 그의 아버지는 법학박사였다. 그는 학구적인 가정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1648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학생신분으로 안톤과 함께 ‘성서회’(Collegium Philobiblicum)를 만들어 성경연구와 기도운동을 일으켰다. 그 후 스페너의 부름을 받고 할레대학에서 교수 및 목회생활에 들어갔다. 이 할레대학의 유명한 점은 경건주의 운동의 산실일 뿐만 아니라 세계 선교의 센터역할을 한 것이다. 당시 기독교는 아직 선교에 눈을 뜨지 못했다. 하지만 프랑케와 그의 동료들은 선교사명에 불타기 시작했다. 덴마크의 프레드릭IV세가 인도에 선교사를 파송하고자 했을 때 자원자는 역시 프랑케의 제자들이었다. 18세기 어간에 적지 않게 60여명의 외국 선교사가 이 할레대학 출신으로 채워졌다. 이렇듯 프랑케를 중심으로 한 할레대학은 독일교회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죽은 정통의 껍질을 벗고 살아있는 교회로 탈바꿈을 하는데 큰 활력소 역할을 했다. 이 할레대학은 창설된 지 반세기도 못되어 약 6,000명 이상의 목사를 배출하여 독일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 일꾼을 보냈다. 비록 할레대학을 본산으로 경건주의가 성행한 기간은 짧았으나 그로 인해 끼친 선교와 봉사정신은 여러 세대에 걸쳐 사라지지 아니하였다.

진젠돌프 백작과 모라비아 교회

진젠돌프(Nicholas Ludwig Zinzendorf, 1700-1760) 백작은 할레대학의 사람이었다. 그는 10세부터 16세까지 할레(Halle)대학에 들어가 프랑케로부터 교육을 받았었다. 그는 이곳에서 생명력 있는 신앙과 순결한 영적 생활 그리고 세계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는 학생시절 5명의 소년들과 함께 “겨자씨회(Order of the Grain of Mustard Seed)”라는 신앙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비밀스런 영적 집단으로서 그 구성원은 기도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들 모임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증거하고 다른 그리스도인을 그들의 교파에 관계없이 함께 모아 교제하며, 신앙문제로 고민하는 형제들을 도우며 미지의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진젠돌프가 해외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던 것은 학생시절이었다.

진젠돌프는 대학시절 자기공부 뿐만 아니라 대학 복음화 사역도 병행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신앙 활동을 하며 계속 신학공부를 하기 원했다. 그러나 가족들의 반대로 빗텐베르그(Wittenburg)대학으로 옮겨 법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는 졸업 후 1721년에는 삭손 지방의 정부관리가 되었다. 이 무렵 보헤미아에서 가톨릭으로부터 박해를 당하여 망명해 있던 후스(John Huss, 1369-1415년) 일파가 모라비아(Moravia)에 있다가 다시 핍박이 시작되자 진센돌프 백작의 영토를 피신하여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이것이 모라비안 교회이다. 그는 Bohemian 형제단의 후계자들을 영접하여 자기 영지인 베델스돌프(Berthelsdorf)에 거하게 하였다.

그는 피난민 숫자가 300명이 넘자 “주님의 망대(Hernhut)”라는 신앙 공동체의 마을을 세우고 지도자가 되었다. 이 단체의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일치였고 특히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전폭적인 정신을 기울이는데 있었다. 진젠돌프 백작의 모라비아 교회는 선교에 힘썼고 서인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진젠돌프가 이끈 모라비안파는 수적으로 아주 극소수였다. 하지만 그들의 영적 유산은 결코 과소평가 할 수 없다. 요한 웨슬레(John Wesley)를 비롯하여 세계의 많은 전도자들이 그들의 열심과 비전에서 영감을 받아 헌신하였다.

맺는 말

이상에서 우리는 근대사의 선교적 진원지를 살펴보았다. 사멸된 정통만을 고집했던 독일 교회는 한마디로 적폐로 귀착했다. 종교개혁의 발원지가 어느새 생명력을 잃은 것이다. 이에 스패너를 중심으로 경건주의 운동이 태동했고 그 영향은 프랑케와 할레대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진젠돌프와 모라비아 교회를 통해서 선교가 불일 듯 일어났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썩은 물에는 생명체가 살 수 없다. 성령의 역사는 생명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늘 활화산처럼 성령의 불꽃이 타올라야 한다. 그것은 흐름이며 유동성이다. 안정을 희구하고 폐쇄적인 게토를 형성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병들게 한다. 골고다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 예루살렘에서 땅 끝으로 퍼져 나가듯 선교의 불길도 독일에서 시작하여 인근 나라도 점화되었다. 현대는 물질 만능주의, 쾌락주의, 합리주의, 인본주의, 다원주의, 집단 이기주의가 판치는 세상이다. 이때에 근대역사 속의 선교 효시가 된 독일처럼 다시 한 번 영적 새 물결을 갈망해볼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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