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단(Ramadan)과 크리스천 : 선교의 창 (11)

송종록 목사

(크로스 선교전략 연구소)

 

만일 집과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거대한 쓰나미가 오고 있다면 우리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예 영안이 없어 무의식 가운데 있거나 인지한다 해도 “설마”하며 눈앞의 자기 일에 메여 땅 따먹기에 급급하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은 비극이고 한탄스러운 일이다. 속히 마음을 비우고 단합하여 장차 올 재앙에 대비해야 한다. 쓰나미 앞에서는 너도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도전은 하나의 영적 쓰나미에 비교된다. 저들의 팽창성은 놀라울 뿐이다. 기독 넷 자료에 의하면 “지난 50년간 이슬람은 235%를 넘는 성장률을 기록한 반면 상대적으로 기독교는 47%”일 뿐이다. 서유럽은 이미 이슬람의 영향권에 들어갔으며 한국도 저들의 사역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추세로 나간다면 어떻게 될까를 계수하며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맥락 가운데 저들의 라마단이 또 시작된 것이다. 이 기간은 영적 긴장감과 도전이 일년중 최고점에 해당된다. 헌데 오늘의 우리 교회들은 어떠한가? 저 멀리 밀려오는 태풍의 영적 먹구름을 보고 있는가? 교단적으로 초교파적으로 위기감과 연합적 대책을 강구하고 있는가? 혹시 태평무사 안일함 가운데 오직 내 교회 성장이라는 울타리에 갇혀있지는 않는가? 이 치열한 영적 싸움판에 우리 크리스천들과 교회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마단은 이슬람교도들의 성월(聖月)이자 단식월이다. 2014년 라마단은 6월28일(Saturday)-7월27일unday)일까지 30일간이다. 북미주 달력으로는 하루 늦은 6월29일부터 시작된다. 라마단(Ramadan)이란 아랍어로 '~을 이끌어내다', '유도하다'라는 의미로, 'ramida', 'ar-ramad'에서 파생되었다. 이는 이슬람 달력으로 아홉 번째의 달을 가리키며 ‘타는 듯한 더위와 건조함’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라마단 기간은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메트(Mahomet)가 천사 가브리엘(Gabriel)로부터 코란을 계시 받은 신성한 달로 여겨 금식의무가 요구된다. 라마단의 금식은 푸아사(PUASA)라고 하며 모든 무슬림이 따르는 5대 의무 중 하나이다. 금식의 시기는 매년 각 나라의 이슬람 중앙서원에서 공지하는 시간에 따라 지켜지는데 대체로 오전 6시-오후 6시까지이다.

이 라마단은 연중 한 달을 해가 뜨고 지기 전까지 음식은커녕 물조차도 마시지 않는다. 어떤 이는 침까지도 삼키지 않기 위해서 땅에 뱉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흡연, 성행위, 폭력, 화, 시기, 탐욕, 중상, 음행 등 반 종교적인 행위를 삼가 한다. 단, 건강상 이유나, 어린 아이들(일반적으로 7-8세가 기준)은 제외되며, 군인과 사막을 여행하고 있는 자 그리고 끼니를 안 챙겨 먹었다가 목숨이 왔다갔다할만한 사람들도 제외된다. 생리 중인 여성도 제외되는데 나중에 빠진 기간만큼 보충해야 한다. 라마단의 주된 목적은 교도들에게 인내와 자제력을 가르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아보게 하며 알라 신에 대한 복종을 나타내게 하는 신앙행위이다. 저들은 이렇게 금식을 하면 하늘의 상급이 증가하고 알라로부터 복의 복을 받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아무튼 지구촌의 1/5에 해당하는 인구가 이 뜨거운 여름에 열사의 땅과 세계 도처에서 금식을 하고 있다. 인간이 하루 만의 금식도 쉽지 않는데 그것도 한 달간이나 금식하며 일상을 영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생활 양태 하에서는 인간이 비인간화되기 쉽다. 이슬람교는 대체적으로 제정일치를 추구한다. 종교가 국가이고 문화이며 관습이다. 따라서 현세적 사람은 물론이고 여기서 태어난 후세들은 이 체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생래적으로 이슬람 문화에 체질화된 인간은 그 사상에 대한 객관적 판단 자체를 터부시하며 결과적으로 맹종하게 된다. 라마단도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다. 과연 그들 중 라마단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자는 얼마나 될까? 사회의 분위기나 혹, 후한이 두려워 행세하는 자는 없을까? 같은 하늘 아래 행복을 누리며 자유롭게 살아야 할 인간이 집체적으로 종교라는 굴레에 묶이어 신음하고 있다는 것은 아픔이다.

이슬람교와 라마단. 해마다 저들은 이 고통의 한 달을 통해 동질성(Unity)을 회복하며 공격적으로 대오를 맞춘다. 이에 대한 우리 크리스천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그 교리는 타도의 대상이나 사람은 포용의 대상이다. 우리는 혜안으로 쓰나미 같이 밀려오는 영적 먹구름을 직시하며 역라마단운동을 펼칠 필요가 있다. 어두움의 세계에는 결코 자비란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저들을 억압하고 부자유하게 한 모든 악한 세력과 궤휼은 예수의 이름으로 타파하되 인간은 용납하며 그들을 자유케 해주시도록 하나님께 청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은 존엄한 존재로서 주님의 사랑과 구원의 안목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첫째로 이슬람교와 라마단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일이다. 손자병법(孫子兵法)에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란 말이 있다. 적을 모르고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둘째로 저들의 고통을 이해하며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다. 이는 힘이나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신(성령)으로 되기 때문이다. 신년 특별새벽기도를 하듯 교회가 문제의식을 갖고 공통으로 대응해야 한다. 셋째로 주변의 무슬림들을 판단하며 경계의 눈초리로 대하기보다는 주의 사랑으로 살피며 섬기는 일이다. 사람의 마음을 여는 키는 사랑 이상 다른 방책이 없다. 사랑이다. 주님은 자기포기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다.

넷째는 교회적으로 교단적으로 막힌 담들을 헐고 주안에서 소통하며 이슬람에 대한 체계적이고 연합적 대책을 세워 집행해야 한다. 지금처럼 무관심, 무대책, 무능력이라는 3무로 일관할 때 큰 불행을 야기할 수 밖에 없다. 다섯째는 가시적 교회보다 하나님의 킹덤을 의식하며 교회 안의 모든 에너지를 선교적으로 분출시켜야 한다. 이것은 교회가 종말론적 시각에서 유람선이나 병원선 차원을 벗어나 전투함의 기능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엡6:12-13a) 이메일: jrsong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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