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

송종록 목사

(크로스 선교전략 연구소)

 

하나님은 왜 이 지상에 자신의 몸된 교회를 두셨을까? 여기에는 창조주의 분명한 의도가 있다. 그것은 교회를 통해 복음이 열방에 선포되고 죄와 사망가운데 있는 인간이 구속함을 입어 주님을 예배하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교회는 시작부터 철저히 선교적이었다. 만일 교회가 이 선교적 사명을 망각하고 인간 중심으로 나아갈 때 성령님은 떠나기 쉽다. 결과는 유럽교회처럼 고색창연한 예배당만 덩그렁 남게 된다. 이것은 지난 2000년 기독교 역사의 예증이다. 이에 교회는 늘 자기를 성찰하며 나아가야 한다. 교회가 아무리 크고 위세를 떨친다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배척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대하신 참다운 교회 상은 무엇인가? 선교적 교회이다. 선교적 교회론에 있어서 교회는 선교사들을 세상으로 ‘파송하는’(sending) 기관이 아니라 교회 그 자체가 복음과 함께 세상에 참여하고 세상을 변혁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파송받은’(being sent) ‘사도적 공동체’(Apostolic Community)인 것이다. 즉, 선교적 교회는 ‘보냄받은 교회’(a sent church)이며 그래서 ‘가는’(Going) 교회이고, ‘가야만 하는’ 교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적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the mission of God)의 산물이며 하나님의 선교가 교회를 생성하게 하는 근원이라는 것이다.

선교적 교회에 대한 신학자들의 이해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의 출발은 어디서부터 인가? 이는 이미 성경에 나타난 성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미국 콜롬비아 신학교의 석좌교수인 데릴 구더(Darrell Guder)는 선교와 교회의 관계를 하나님에 대한 선교적 이해로부터 유추해낸다. 그는 요한복음 20:21에 근거하여 세상을 향한, 그리고 세상 안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을 “보내심”의 활동으로 여기며 하나님을 ‘선교사 하나님(missionary God)’으로 이해한다. 성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성령님은 교회를 세상에 탄생케 하고 그 교회를 통해 역사 하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삼위 하나님의 보내시는 선교, 즉 미시오 데이(Missio Dei: Mission of God)는 교회를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도구로 이해하게 한다. 찰스 벤 엥겐(Charles Van Engen)은 그의 저서 God’s Missionary People 에서 교회가 결여된 선교는 사회적 활동주의에 국한되며, 반대로 선교적 기능을 상실한 교회는 선교와 교회의 올바른 관계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단언한다.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은 좀 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는 선교의 사명을 잃은 교회는 신약의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통적 교회와 선교적 교회의 비교

선교는 일차적으로 인간이나 교회의 활동보다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아야 한다.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교회는 이 사역에 도구와 수단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첫째, 전통적 교회는 매력적인 건물과 환경, 프로그램을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찾아오게 하는 구조를 갖는데 반해 선교적 교회는 건물 밖 지역 공동체를 향해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기존의 교회가 모이는 쪽에 역점을 두었다면 선교적 교회는 흩어지는 쪽에 중심이 있다. 둘째, 전통적 교회는 교회와 세상을 구분하는 이원론이 강하지만 선교적 교회는 문화와 세상에 참여하는 메시아적 영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다시 말해 단순히 선교사나 목회자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됐지만 다시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선교사라는 것이 핵심이다. 셋째, 전통적 교회론은 상하 계급적인 구조를 갖게 되고 이런 계급적 리더십은 평신도들을 수동적 존재로 만들기 쉽다. 반면 선교적 교회론은 만인제사장으로서의 성도들이 각자의 은사에 따라 사역을 감당하고 수평적인 리더십을 형성함으로써 얻게 되는 유기체적 사역을 강조한다. 이에 대한 총신대 김지찬 교수는 “선교적 교회란 전통적 교회의 대안이나 부정이 아니라 전통적 교회를 더욱 복음에 합치하도록 돕는 보완적 교회론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고 주장한다.

선교적 교회의 핵심요소(DNA)

프로스트(Michael Frost)와 허쉬(Alan Hirsch)는 다음의 세 가지 핵심요소를 강조하였다. 첫째, 성육신적 교회론(Incarnational ecclesiology)이다. 선교적 교회론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유전인자는 ‘성육신 원리’에 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주님은 이 땅에 우리의 모습으로 ‘성육’(Incarnation)하셨다(요1:14; 빌2:5-8). 세상으로 보내어진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써 예수님의 제2의 성육신과 같다. 그러므로 지상의 교회는 세상과 눈높이를 함께하는 낮아진 교회여야 한다.

둘째는 메시야적 영성(Messianic Spirituality)이다. 선교적 교회는 세상을 향한 ‘메시아적’ 영성으로 무장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의 영성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서 보여주었던 사역과 삶에 나타난 그 메시아적인 영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교회의 존재와 활동은 모두 구속적(redemptive)인 것이어야 한다. 선교적 교회는 구속적인 케리그마와 메시지를 그 안에 가지고 있는 종교적 기관 정도가 아니라, 그 자체의 존재 양식이 케리그마적이고 구속적이며 세상의 소망이어야 한다.

셋째는 사도적 리더십(Apostolic Leadership)이다. 선교적 교회의 리더십은 크리스텐덤적-제도적 교회가 가지는 계급적/관료적 리더십 구조가 아니라, 세상으로 보냄 받았기에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도적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현재적 필요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완성을 향한 미래적 가치를 추구한다. 그 속에 있는 크리스텐덤 구조(Christendom mode)를 버리고 카타콤 기독교 정신, 풀뿌리 복음 운동을 회복하는 것이다.

맺는 말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의 행위로 탄생되었다. 이에 교회는 생내적으로 선교DNA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선교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교회의 존재론적 자기이해가 선교적임에도 불구하고 선교를 교회의 중심적 정체성으로 삼는 교회가 많지 않다. 이유인즉, 첫째는 선교적 교회론에 대한 신학의 부재이다. 특히 교회선교의 뿌리가 되는 미시오 데이에 대한 이해가 보편적이지 않다. 결국 선교는 하나님이 인간 사회를 향해 행하시는 많은 일들 가운데 하나로 보는 견해이다.

둘째는 이원론적 선교시각이다. 선교라는 개념이 일부 특별한 소명을 받은 자들이 행하는 타문화 선교의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다. 기독교회는 그간 교회 그 자체로 선교에 참여하기보다는 교회의 선별된 자들을 준비시켜 그들을 교회의 대표로 파송하고 교회는 그들을 후원하는 구조로써의 선교를 시도해왔다. 셋째는 담임 목회자의 목회 비전과 철학이다. 교회의 방향은 최고 리더십에 의해 좌우된다. 상당수의 목회자들은 선교를 교회성장을 위한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선교를 교회 정체성의 중심으로 보지 못하는 관점의 차이이다.

넷째는 교회의 체질이다. 이미 내려온 전통과 문화에 의해 굳어져 버린 교회의 내면적 구조가 새로운 변혁을 수용할 수 없게 한다. 따라서 지난 2000년의 기독교 선교는 그 파괴력이나 속도감에서 세상을 압도하지 못했다. 교회가 창조 때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본질로서의 선교적 임무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이제 세상을 향한 교회의 선교는 어떠해야 하는가? 중력에 끌리듯 관행으로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 교회가 주의 나라확장을 위해 총체적으로 일어서야 한다.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가 답이다. 이메일: jrsong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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