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을 대비 한 연합적 선교사역

송종록 목사

(크로스 선교전략 연구소)

 

지난 4월 25일, 네팔의 간다키구람중현에서 지진이 났다. 현지 시각 오전 11시 56분 26초였다. 진도7.8의 강진이었으며 진원까지의 깊이는 대략 15km이다. 1934년 네팔 비하르 지진 이후 발생한 두 번째로 큰 지진이다. 사건 열이틀이 된 5월 7일 현재 사망자만 7,600명이 넘었으며 부상자도 1만5천 명이나 된다. 매일 자고 나면 그 수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AF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지진 발생 이후 수도 카트만두 인구가 3분의 2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여진 공포에 시달리다 고향마을의 피해복구 위해 주민 90만 명이 거주지를 떠난 것이다. 이제 우기철을 앞두고 네팔은 전염병과 여성들은 인신매매 위험에 노출돼 있다. 가족과 거주지를 잃은 많은 사람들이 천막에 웅거하고 있으며 어떤 곳은 아이들이 흙탕물을 마시고 있다. 이들의 참상과 아픔을 무엇으로 다 말하랴! 이들을 돕기 위해 몇몇 국가의 재난 구조팀이 현지에 갔다. 국제적십자사 같은 봉사단체도 여러 모양으로 돕고 있다. 하지만 구호품이나 구호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 속담에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정도이다. 한 지구촌에서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는 이 때에 우리 교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성경이 말하는 이웃 조직신학에서 일반적으로 해석하기를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도처에 징조가 나타난다고 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회심하고 복음이 편만이 선포되며 재난과 환난이 빈번하고 적그리스도가 속출하며 큰 배도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아무튼 20세기 후반에서부터 발생하는 천재와 인재의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하며 그 주기도 빨라지고 있다. 결국 에덴의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인간이 이렇게 피해를 입고 있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깨어있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을 살펴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내 이웃은 누구인가? 지금 내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그이가 내 이웃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처럼 사람이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데 무슨 설법이 필요한가? 죄가 어떻고 율법이 어떠하며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얘기할 때가 아니다. 우선 내 앞에 놓여진 한 생명을 건져놓고 볼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거나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 교육을 받고 싶으나 재정능력이 안된 사람 등 이 세상에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홀로 설 수 없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다. 물론 국가나 사회복지기관이 있다. 그러나 이런 제도권의 역량은 제한되어 있으며 구제 역시 기능적인 책무를 다할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선교적 차원에서 일정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 교회마저 등받이가 되어 주지 못한다면 누가 과연 이들의 힘이 되어줄 수 있단 말인가?

재난에 대한 교회의 반응 이번 네팔 지진에 대한 기독교회의 반응은 어떠한가? 다수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무관심하다. 극히 소수의 교회만이 움직인다. 중보기도를 하며 구제 헌금을 모아 전달한다. 하지만 이 마저도 소극적이다. 그 시기도 일반 사회기관에 비해 한참 늦으며 액수도 체면치례 격이다. 왜 그런가? 내 일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번만이 아니다. 그간 일어났던 국제적 재난마다 타성적으로 대처해왔다는 사실이다. 교회가 세상에 너무 이기적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하나의 질문이 있다. 우리 주변에 많은 단기선교 팀과 전문 인력들이 있는데 왜 네팔에 급파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위험하고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충분히 준비된 후 7월이나 8월에 가겠다는 것인데 그 때는 이미 상황 끝이다. 세월호 구조대가 그러했다. 물론 이 후에도 할 일은 많다. 그러나 모든 것은 때가 있다. 절대 절명의 타이밍을 놓쳐 버리면 한 생명을 더 살릴 수 없다. 세상이 뒤집히고 인명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 교회가 그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정작 살려달라고 손을 내밀 때는 미동도 하지 않다가 상황이 호전되고 어느 정도 안정된 후에 선교하겠다고 나타나는 팀을 현지인은 어떻게 볼까? 단기선교는 과연 누구를 위한 사역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선교란 이웃을 돕겠다는 것이다. 헌데 현지인의 필요와 긴급한 시기를 묵살하고 내가 좋은 때에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은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이다. 이것은 초점이 상대가 아니라 자신이며 선행을 가장한 유람이요 일종의 자기만족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재난 시 만사를 제쳐놓고 용수철처럼 튈 수 있는 911같은 인명 구조대가 있어야 한다.

Task Force Team for World Mission 재난은 도둑과 같다.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른다. 재난이 발생한 후 뭔가 준비해 도우려면 이미 늦다. 한시가 급한데 언제 무엇을 준비한단 말인가? 훌륭한 전략은 전쟁을 대비 해 군사를 모으고 훈련시켜 항상 임전태세를 취하게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교회 역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Task Force Team을 만들어 상설화하고 주기적으로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이 팀은 가능한 노회나 총회 아니면 연합회 차원에서 준 독립기관이자 비영리단체로 두는 것이 좋다. 여기에 대원으로 헌신한 사람은 평소 생업에 종사하다 비상시 예비군처럼 동원되어 사역을 펼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전문 인력을 전산화해 관리해야 하며 기금도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 참고로 교회가 재난이 있을 때마다 홍보하고 모금하는 것은 짜증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그래서 교회는 사건사고와 무관하게 평소 예산의 1%를 이 사역을 위해 기금을 마련하면 큰 부담이 없다. 이에 인력과 기금이 준비되어 있으면 재난 시 곧장 대응할 수가 있다. 재난은 제 3세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선진국에도 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고 사회보장이 잘된 곳이라 해도 갑자기 전기가 나가고 수도관이 터지며 통신이 두절되고 건물들이 무너진다면 공적기관의 힘은 한계적일 수밖에 없다. 이때 여러 기독교 자체의 구조팀이 있다면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세월호 침몰 때에도 인명을 다수 구조한 것은 해경보다는 주변의 작은 어선들이었다.

맺는 말 그간의 한국교회 선교는 보수성이 강했다. 주로 영혼구원과 제자양육 그리고 신학교 설립과 교회개척이라는 궤적에 맞추어 있었다. 그러다보니 긍휼사역이나 재난 구조 같은 일에는 거리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역의 폭을 넓혀야 한다. 총체적 선교가 되어야 한다.

주님은 항상 눈과 마음이 이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에게 가 있었다. 귀신들린 자, 포로된 자, 배고픈 자, 병든 자 등 도저히 혼자서 설 수 없는 사람들을 민망히 여기셨다. 그리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고통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무슨 말이 필요하단 말인가? 영혼구원이나 제자훈련은 그 다음이었다. 고난 받을 때 외면하고 편안할 때 사역자를 보낸다면 그들이 마음 문을 열 것인가? 그러므로 이제 한국교회는 미래를 예견하고 항상 Task Force Team을 대기시켜 적재적소에 투입해야 한다. 이는 지상군이 가기 전에 폭격기가 먼저 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고통은 또 다른 기회이다. 선교의 기회를 놓치고 뒷북을 칠 때는 이미 늦다. 마음이 닫힌 후에는 불도저로 민다 해도 문을 열기 어렵다. 지금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웃은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 이메일: jrsong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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