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건택 목사 (밴쿠버빌라델비아교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가 어디서 잘못된 것인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기 어려울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빌립보교회에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고 유대교의 규례들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래서 교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불화와 신앙의 흔들림이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참신앙의 도리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 고민하고 있는 때에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해결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본문말씀이다. 오늘 본문말씀이 조금 복잡하고 어려운 교리적 설명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내용은 기본으로 돌아가라는데 있다. 다시 말하면 자신들이 믿는 믿음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과 성격이 무엇인지 이해하라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것은 예수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이 세상에 오직 두 부류의 사람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 한쪽은 사탄에게 붙잡힌바 되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하나님께 예수그리스도께 붙잡힌바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이미 예수께 사로잡힌바 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예수께 잡힌바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려준다.
1.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7-8절).
7절과 8절에서 사도 바울은 세 번이나 반복하면서 자신에게 유익하던 그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8a).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 귀중해서, 그리스도를 얻는 것(8b)이 너무 중요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던진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고 말씀하시면서, 보화도 얻고 자기 소유도 그대로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치신다(마13:44-46).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는 이전에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 예수께 사로잡힘으로써 자신에게 제공된 새로운 삶의 방식 사이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차이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저 단순히 조금 바꾸고 조절하면 끝나는 문제나 혹은 부가적인 요소를 더해서 종합하면 되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전격적인 선택을 요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바울은 기꺼이 자신이 이제까지 자부하던 그 모든 자신의 성취를 포기한다. 여러분들은 어떠한가? 혹시 아직도 그것들을 포기하지 못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자라가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얻지 못하지는 않았는가?
2.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의를 지닌 사람(9-11절).
9절을 시작하면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다시 설명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발견되는 것, 이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는 연합된 관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것은 기독교신앙의 가장 큰 비밀 가운데 하나다. 믿음으로써 우리는 2천년전 우리 죄를 위해 고난당하신 주님과 함께 고난당했으며, 믿음으로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죽으신 주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으며, 믿음으로 우리는 사흘 만에 다시 사신 주님과 함께 부활하였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고난당하고 죽었으며 부활한 것이다.
이 신비한 연합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 부활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의를 나의 의로 여기신다.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발견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발견한 하나님께로 난 의다.
사도 바울은 율법아래 있었을 때 율법의 명령들을 흠 없이 지킨 사람이다. 하지만 율법아래 자신이 이루어온 그것이 사실상 자기 스스로의 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자신이 가진 의는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난 의라는 사실을 주장하면서, 그것이 율법에서 난 의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 의가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나의 의는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의다. 내가 교회에서 봉사하고 섬기는 것은 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보시고 의롭다고 여기신 그 하나님의 의를 얻은 자로서 살아가는 삶의 열매요 감사의 결과다. 우리의 봉사와 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다보니 나타나게 되는 결과이지 내가 교회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이루어드리는 일이 아니다. 나의 공로, 나의 의가 아니라는 말이다.
3.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사람(12-14절).
어떤 사람들은 12-14절 사도 바울의 표현을 보면서 “봐라, 사도 바울도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지 않았느냐? 구원받기를 소망은 했지만 그것을 최종적으로 확신하지는 못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구원, 믿는 자의 구원에 대해서 굳은 확신을 지닌 사람이었다. 빌1:6에서도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또 딤후1:12에서도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분명한 확신을 나타낸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바울을 예수께 잡힌바 된 사람이 되게 하신 데는 목적이 있으셨다.
사도바울은 우리 믿는 자들이 이미 구원을 얻은 것을 분명하게 확신했다. 하지만 아직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의 잡힌바 된 목적, 즉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까지도 본받게 하시려는 그 목적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은 삶을 이루게 하시려는 그 목적에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달려간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바 되셨는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소중한 줄로 알아서, 자신이 귀하게 여기던 그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께 내어놓고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스도께 잡힌바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난 의를 소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리스도께 잡힌바 되었다는 것은 오늘 이 세상에서 부활의 능력을 맛보며 살아가면서 여전히 잡힌바 된 그것, 곧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고난에도 참예하고 그의 죽으심까지도 닮아가는 삶을 이루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말씀을 듣고 감화를 받아 “주여,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데는 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 고백을 실천하는 데는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러야한다. 마찬가지로 “사랑하며 살겠습니다”라고 다짐하는 데는 희생이 요구되지 않지만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참는 희생이 요구된다. 따라서 그 모든 희생을 기쁨으로 감내할 수 있을 만한 사랑의 비밀이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는데 꼭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말씀하셨다. 이 예수님의 죽음까지도 본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