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랑을 확증하고 행복하라

(로마서 5장 5-8절)

김 광 삼 목사 (나성제일교회)

모든 사람들은 사랑받기를 원하고, 또한 그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랑이 확인될 때 행복하기 때문이요.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다.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62:5)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역시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그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하신다. 그래서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은 그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서 아브라함에게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받치라는 시험을 하셨다(창22:12).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도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21:15).

오늘 본문 로마서 5:8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고 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해 보여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이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노라(사43:4)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전부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사랑은 어떤 것인가?

(1)선수적인 사랑이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누가 먼저 사랑했느냐?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동등한 조건이나 관계에서는 이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많을 때 누가 먼저 사랑했느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먼저 사랑했다면 이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감정은 늘 변하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했다. 그것도 내가 연약할 때에(6절), 내가 경건치 않을 때에(6절), 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8절)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10절)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은 영원하고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이다.

(2)내어줌의 사랑이다. (롬8: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어주신 사랑이다. 하나님은 죄와 허물 많은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고 희생시켜 주셨다. 왜냐하면 우리를 너무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신 것이다.

(요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은 내어주심의 사랑이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사랑을 받으려고만 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사랑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내어 주게 되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게 있는 것을 주고 싶다. 왜냐하면 아깝지 않기 때문이다.

(3)생명을 대신한 사랑이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롬6:23). 그러므로 반드시 죄 값이 지불되려면 죽어야 한다. 구약시대에는 수많은 짐승들이 희생제물이 되어 인간의 죄 값을 대신해서 피 흘려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제사드리기 전에 먼저 제물의 머리 위에 안수를 한다. ( 3:2)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문에서 잡을 것이요라고 했다. 안수는 일치와 전가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양의 머리에 안수함으로 나와 양이 하나가 되고, 안수함으로 나의 죄를 그 양에게 전가시키고 죽인 것이다. 그런데 그 짐승이나 양은 나를 대신해서 내 죄를 짊어지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예표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요1:29)고 했다. 죽음을 통해서만이 죄 값이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온 인류의 대속의 죽음을 당한 것이다. 죽음이 없이는 죄 문제가 해결이 안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기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과 바꾼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지옥 불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버리시고 죽으신 것이다. 로마의 권력이 죽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죽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이 되거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란다. 누가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겠는가?(손가락 하나도 주지 못한다) 사랑은 희생이 따른다. 희생 없는 사랑은 없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의 관계는 확증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내어주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기까지 사랑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보여드려야 할 것이다.

(4)이렇게 큰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행위이다. 인간의 행위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행위가 예배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경배하며 숭배하는 시간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시간이다. 예배 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고,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지는 시간이며 세상에서 시달린 영혼들이 영적인 힘을 공급받아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시간이다. 찬송가에 ‘이 안식일 지킴으로 새 은혜 입어서’라는 가사가 있다. 그렇다. 우리는 예배를 성공적으로 드림으로 새 은혜를 입는 것이다. 우리는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성경에는 예배를 소홀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에 대하여 하나님은 진노하셨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삼상2:17)고 했다. 제사를 무시하고 예배를 멸시하는 것이 죄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30).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은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예배를 멸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귀하신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그 큰 사랑을 받은 자들이다.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눈에 우리가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노라(사43:4)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예배를 소중히 여기며 예배에 목숨을 걸고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고 하셨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너무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 사랑 때문에 주님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다. 마지못해서 의무감 때문에 예배드리고 억지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크신 사랑 때문에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며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그 사랑을 확증해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향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주님께 보여 드려야 하지 않을까?(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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