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서택 목사 (청주 주님의교회)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고 너무 안타까워 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안타까움을 뛰어넘어 화가 좀 났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제자들이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전전긍긍하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17절을 보면 ‘너희는 어찌 그리 둔하냐?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주님을 믿노라하며 그리스도인이라 큰 소리 치면서도 염려와 근심에 파 묻혀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의 말씀입니다.
인간이 염려하고 근심하는 경우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필요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근심염려에 붙들리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내 눈앞에 있어야 하는 것들이 없고 당장 내 손에 붙잡아야 하는 것들이 모자라기 때문에 불평하고 염려하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눈에 보이는 것에만 신경 쓰고 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주님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이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말씀과 연결된 막8:1에 보면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벌써 3일이 지나서 군중들은 배고픔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배고픔을 알고 먹을 것을 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때 제자들이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어떻게 먹일 수 있느냐고 반문을 합니다. 제자들의 대답은 정답이었습니다.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제자들을 향해서 어떻게 그렇게 둔하냐? 이런 것도 깨닫지 못하느냐? 이런 것도 모르면서 날 따른다고 할 수가 있느냐? 그 기적과 이적을 보았던 현장의 주역이 나 이었지 않느냐? 지금 내가 여기 있는데 당장 먹을 것이 없다는 것으로 너희 속에 염려와 근심이 꽉 찰 수 가 있느냐? 믿음이 없는 자들아...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이 광야에 굶주림에 지쳐있는 일만명의 사람들. 그리고 고작 보리떡 7개를 가지고 있는 초라한 현실을 넘어서 다른 무엇인가를 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눈을 떠서 현실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큰 능력의 손을 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도 그 사람의 성숙도에 따라서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점점 변화되어갑니다. 지금 당장 내게 보이는 것 때문에 좌지우지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묵묵하고 현실과 상황을 대체하며 보이지 않는 내일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표현하는 사실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 뒤로 주님의 손길이 펼쳐졌을 때 하나님께서 관여하시고 축복하시고 역사하실 때 그 상황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초현실파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지금 당장 보이는 것에만 내다 보다 보니까 그들이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믿음이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귀신을 쫒아 내고 병든 자를 고치고 물위를 걷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고 있을 때 그 현장에 있었던 제자들은 점점 그들의 믿음은 확고해가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하루하루가 흥분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매달리다 보니까,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만 시선이 집중 되다 보니 주님에 대한 믿음이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 무너져 버린 믿음으로 인해서 당장 이제 끼니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몇 시간 전에 4천명을 먹이고도 남은 기적을 본 제자들의 시선이었습니다.
출애굽시절에 가나안을 정탐했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압니다. 민13:2에 보면 정탐보고대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열 명의 정탐군은 거기서 본 모든 것을 그대로 보고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만약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정답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믿음의 눈을 감아버리고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이것이 정답이고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보고를 들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리를 높여 소리 지르며 밤새 곡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민수기 14:11에 무서운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언제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정탐꾼의 보고는 하나님을 멸시한 것으로 보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말하고 보이는 대로 말했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나를 멸시한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통곡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결과는 참 두려운 것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민14:21에 보면 “너희는 그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라” 보이는 것만으로 정답을 삼고 보이는 것만으로 반응했던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한 사람도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만 하나님을 멸시했을까요?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근심걱정에 묶여있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실 때 하나님께서 “네가 나를 멸시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두 명의 정탐군중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똑같은 상황을 보고도 이렇게 말합니다. 민14:9에 보면 “두려워하지 마라 그들은 우리 밥이다” 여호수아 갈렙은 본 것을 그대로 보고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갈렙은 가나안 족속 너머에 기다리고 계신 위대한 하나님의 손길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 가나안 족속에게는 하나님이 없고 우리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현실은 갑갑하고 어려운 것 같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군대장관이 되어서 가나안 족속을 무찌르게 하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넉넉하게 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렇게 보고했던 것입니다. 이 신앙고백이 오늘 여러분에게 있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어찌 축복을 받겠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초라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거룩한 믿음의 칼을 가십시오. 믿음의 칼, 신앙의 칼입니다. 모든 어둠의 세력을 이겨내고 모든 사단을 격파하는 믿음의 칼을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현실을 봐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믿는 자들이 희망과 비전을 말하지 않는다면 사회와 가정은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의 조국을 바라볼 때 정치판이 엉망입니다. 사회의 이곳저곳에 인륜이 파괴됩니다. 어디를 바라봐도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희망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현실을 보이는 것만 말하고 해석하고 평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표입니다. 모든 것에 예수님을 더해야 합니다. 사업장에도 예수님을 더해야 합니다. 자녀를 볼 때에도 예수님을 통해 보십시오. 돈을 벌 때도 돈을 쓸 때도 예수님을 더해서 예수님이 원하는 곳에 원하는 방법으로 써야 합니다. 취미생활에도 예수님을, 오락에도, 나의 재능에도, 내 가정에도, 내 건강에도 예수님을 더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십시오.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뛰쳐나와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 믿음의 세계 속에서 맘껏 헤엄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통해 십자가를 통해 모든 것을 직시하십시오.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의 가나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