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웃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4-7절

이남수 목사 (아가페선교침례교회 담임목사)

오늘 말씀은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것은 명령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꼭 하라는 명령입니다.

요즘은 어떤 사건이 지구 어디 곳에서 일어나든지 그 날로 전 세계가 다 알게 됩니다. 자연재해, 테러 등 사건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식 들 중에는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들이 더 많습니다. 이런 안 좋은 소식들을 듣다보니까 우리의 마음이 긍정적이 아니라 부정적이 됩니다. 부정적인 소식을 자꾸 듣다보면 사람의 마음이 부정적이 되고 우리의 마음이 부정적이 되면 기쁨 보다는 불만 불평이 더 나옵니다. 웃음보다는 짜증이 나고 화를 잘 내게 됩니다.

그런데 요즘세상은 나는 나 너는 너가 아닙니다. 요즘세상은 네 문제가 내 문제가 되고 내문제가 우리의 문제가 되는 사회에요. 내가 기분 나빠 인상 쓰고 있으면 보는 사람도 기분이 안 좋아집니다. 반면에 내가 싱글벙글하고 있으면 나 때문에 내 주위가, 내 주변 사람들이 싱글벙글 웃게 되는 것이에요. 아마 이런 것은 여러분들도 충분히 경험 하셨을 거예요. 여러분 가정에서도 아빠나 엄마가 저기압이 되어 있으면 아이들은 눈치를 봅니다. 모두가 같은 분위기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우린 웃어야 합니다. 기뻐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기쁨을, 웃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많이 기뻐하며 웃으라하는 것이지요. 많이 웃되 얼굴만 웃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표정만 웃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속마음까지 웃으라는 것입니다. 속은 상해 있으면서 얼굴만 웃으면 진정한 기쁨의 웃음이 아니지요. 오늘 말씀에서는 진정한 기쁨, ‘기뻐하라’ 진정한 기쁨의 강조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안에 이런 기쁨이 있으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말은 기뻐할 수 있을 때에 기뻐하란 말이 아닙니다. 웃을 일이 있을 때 웃으라는 것이 아니에요.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것은 기뻐할 수 없는 가운데서도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웃어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감옥에 갇혀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감옥에 갇혀있어요. 그러면서도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또 자기 몸에 병이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병이 있어서 가시가 되어 자꾸 자기를 괴롭힙니다. 이런 사도바울이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첫째로,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재물이 넉넉하면 기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재물 안에서가 아니에요. 우리가 기뻐해야 하는 것은 주변 환경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명예와 권력이 있으면 즐겁고 기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박국 3:17-18절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비록 무화가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왜 즐거워하고 기뻐해요? 하나님 때문에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즐거움과 기쁨은 환경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 포도열매나 감람나무나 양이나 소가 없을 지라도 우리의 기쁨은 오직 하나님으로 인해 온다는 고백입니다.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서도 걱정이 없었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주 안에서 다니엘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이방나라 애급으로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런데 아무 걱정이 없었습니다. 왜 그럴 수 있었나요?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무수한 전쟁 속에서도 하나님이여 내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할 수 있었던 것은 주 안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지켜주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스데반이라는 사람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변했습니다. 그의 얼굴이 천사처럼 변한 것은 주 안에서 하나님의 평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뻐하면 이런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면 기뻐하겠다가 아니라 내가 주안에서 기뻐할 때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는 것이에요.

둘째로 기쁨으로 살려면 관용하며 살라는 겁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절). 어떻게 보면 4절과 5절이 별개인 것처럼 보이나 기뻐하라 하고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것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관용이란 뭡니까? 너그러운 마음씨를 말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것은 너의 너그러운 마음씨를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하는 것이지요. 사도바울도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한사람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여러 지역으로 전도여행을 떠나는데 전도여행 중에 젊은 마가라는 사람이 전도하다가 무슨 이유인지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사도바울과 바나바 마가 이렇게 3명이 전도여행을 떠났는데 마가가 도중에 그만 집으로 가버린 것이에요. 사도 바울이 이 일로 마음이 언짢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다시 2차로 전도여행을 떠나려고 하는데 바나바가 또 마가를 데려가자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난번 일을 생각하면 속이 상했습니다. 성경에는 이 일로 바나바와 바울이 심히 다투었다라고 나옵니다. 그리고는 바나바는 바나바대로 바울은 바울대로 따로 따로 전도를 떠납니다.

이제 바울이 나이가 들었습니다. 지난 일을 생각하니 마가가 떠 올랐습니다. 디모데후서 4절11절을 보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디모데여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내게 유익하니라” 바울이 마가에게 관용을 베풉니다. 마가를 다시 이해합니다. 그가 내게 유익하다 그가 내게 필요 없는 사람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관용을 베풀었던 마가가 후에 어떻게 됩니까? 마가는 초대교회의 큰 인물이 됩니다. 성경 마가복음의 저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뿐만 아니라 저 사람도 사랑하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속에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 속에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남을 미워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관용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어 있어요. 이런 관용이 모든 분들에게 넘쳐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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