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하듯 하라

골로새서 3장 22-25절

송정명 목사 (미주쳥안교회)

본문은 바울 사도께서 골로새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주신 말씀입니다.

가정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 자녀들은 모든 일에 부모들에게 순종해야한다, 동시에 부모들에게 과격하게 화를 내면 안된다, 그런 내용의 말씀들입니다. 가족관계에서 지켜야할 여러 말씀을 하신 후 이번엔 종들과 주인 사이, 오늘날로 표현하면 고용주와 사원과의 관계라고 풀이를 해야겠지요. 바울 사도께서 하신 이 말씀의 포인트는 “누구를 대하든지 무슨 일을 하던지 주께 하듯하라”는 것이 중심사상입니다.

첫째, 눈가림만 하지 말고 성실한 자세로 일하라

오늘 읽은 22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당시 로마사회나 헬라사회는 종들이나 노예가 많이 있었습니다. 주인의 부림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주인의 눈가림만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성실한 자세로 주인을 섬기며 일을 하라는 말씀이지요.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 일을 하는 사람이나 국가에서 녹을 받는 사람들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성실하게 자기가 맡은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도 눈가림만하고 적당이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기관이나 정부로부터 녹을 받고 있는 공무원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있거든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어요. 요즘은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 가면 빨리 일을 처리하는데 30년 전에 DMV나 이민국에 가면 얼마나 짜증스러운지 모릅니다. 그 당시는 하루가 다 지났어요. 일하는 사람들이 잡담을 하면서 줄 서있는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을 보았어요. 그러다가 슈퍼바이저가 지나가면 일하는 척합니다.

요즘 미국의 작은 도시에서는 시장 월급이 대 도시보다 두 배나 더 받는다고 하지요. 거기에다 이런 저런 이유로 돈을 거둬들여 월급 올려주는 명목으로 쓰다가 결국 8명이 구속되고 재판받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이 나라가 왜 이렇게 될까” 걱정스러움이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직장생활하면서 상전의 눈가림만 하는 사람들 혹시 없습니까?

주인이 있을 때는 하는 척 하다가 주인이 자리를떠나면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왜 못사는지 제가 10년전 중국을 갔을때 알게 되었습니다. 가게에 들어가는데 점원들이 앉아서 사람이 와도 그만, 사도 그만, 안사도 그만이에요. 관심이 없어요.

자본주의에서는 점원이 따라다니면 친절을 베푸는데 그 사람들은 안 팔아도 월급 받고 팔아도 월급 더 주는 게 아니니까 얼마나 불친절한지 아, 공산주의가 이래서 잘 살지 못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기독교의 노동윤리 기본자세는 주인을 두려워하면서 성실하게 일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보던지 안 보던지 개의치 않고 주인 보는 앞에서 일한다는 생각으로 회사를 받들고 섬겨야 하는 것이 모든 기독교 사상의 윤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사람의 자세도 마찬가지에요. 목사가 있으면 일하는 체 하는 사람이 있어요. 목사가 자리를 떠나기만 하면 ‘에라 모르겠다’ 하는 것이지요.

어떤 교회 여선교회가 주관되어 선교바자회를 크게 했는데 연합으로 해서 여러 사람이 수고를 하고 있었어요. 담임목사께서 집사, 권사를 격려하기 위해 돌아보는데 회장님이 앞치마를 두르고 나와서 안내를 잘 하는 거에요. 그래서 목사님이 수고한다고 격려를 했는데 목사님이 사라지자마자 에프론 벗어버리고 어디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이런 식으로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기본적인 윤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밧모 섬에서 기도하는 도중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습니다. 그 계시를 아시아의 7개 교회에 알려주는데 그 가운데 서머나교회 알려준 말씀 가운데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여기 죽도록 충성한다는 말씀은 주인이 보든지 안 보든지 충성하는 모습을 의미입니다. 크리스천들의 직업윤리나 노동윤리가 바로 정립이 되면 사람 눈치나 보면서 눈가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 대하듯이 성실한 태도로 섬기는 것입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지 눈가림만 하지 마시고 성실하게 맡겨진 일들을 잘 감당해 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두 번째, 무슨 일을 하던지 주께 하듯 하라(23절)

이 말씀을 자기 생활철학으로 삼고 살아왔던 채의숭 장로님이 LA에 오셔서 간증집회를 했습니다. 진솔하게 간증해가시는 모습을 보고 “아, 이렇게 살아왔기에 이만큼 성공하셨구나” 하는 생각과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분은 칠순이신데 평생 동안 자동차 하나 볼 수 없는 그런 시골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이 농사를 짓기에 공부시키기 어려웠죠. 그러나 부모님들은 소학교라도 졸업을 시켜야 하지 않는가 하여 시골 촌가에서 살다가 대천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 간 곳이 바로 교회당 옆이었어요. 그래서 교회에 적을 두고 살았는데, 그 당시 그 가정으로는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큰 영광인 가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인지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들어갔어요. 고 2때 어느 주일날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꿈을 가져야 한다”고 설교하셨는데 채의숭 소년이 꿈을 가지고 기도를 하게 됐습니다. “나는 대학교에 가서 박사학위 받고 교수가 되고, 두 번째는 큰 회사 사장이 되겠다, 세 번째는 내 평생 100개 교회를 세우겠다” 기도했는데 그 당시 소년의 입장에선 허무맹랑했지요. 어림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그는 결국 대학 수석입학, 졸업, 박사학위, 교수, 큰 기업 회장, 교회를 세계에 75개 교회를 혼자 세웠어요. 그 장로님의 철학이 ‘주께 하듯 하라’는 것이 몸에 밴 거에요. 누구를 만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는 자세를 가지고 생활을 해왔어요. 자기 운전기사가 불교랍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 사람에게 ‘예수 믿어라, 교회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운전기사에게도 주께 하듯 했더니 그 분이 감동을 받고 온 가족들이 교회 나와 구원받았다는 간증이 그 장로님이 쓴 책에 기록돼 있습니다.

주께 하듯 하면 감동을 받거든요. 이런 감동을 줘야 그 사람들의 마음이 열립니다. 가슴에 품고 있는 영혼들을 위해 바울이 말씀한대로 주께 하듯 하겠다는 다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주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 분이시다(25절)

하나님은 사람을 고르시거나 판단하실 때 겉모양만 보지 않으십니다. 베드로도 그 고백을 사도행전 10:34-35에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윗 같은 사람은 여덟 번째 막내에요. 그 당시는 장자계승법이 있어서 웬만하면 장자가 다 계승해 나가거든요. 서열로 따지면 여덟 번째이기에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비나답이 왕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졌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마지막 막내둥이 다윗을 왕으로 삼으셨지요. 물론 다윗도 아름답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중심을 보시고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처녀 총각들이 배우자 찾을 때 몸짱, 얼짱 찾는데 그거 다 소용없어요. 얼짱 몸짱 찾지 말고 여러분 편안하게 해주고 잘해주는 사람 있으면 선택하세요.

하나님께서 외모로 자녀 삼아 주신다면 몇 명이나 합격점에 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골라 뽑지 않고 중심을 보시고 우리를 자녀 삼으신 것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의 삶도 사도바울의 말씀을 따라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주께 하듯 하면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열릴 줄 믿습니다. ‘주께 하듯하라’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시고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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