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현찬 목사 (주예수교회)
올해는 광복 65주년이며, 한국동란 60주년의 해이므로 국내외적으로 그 역사적 의미를 기리는 행사가 많이 열립니다. 우리 교회는 해마다 디아스포라 한인교회로서 1·2세대가 함께 늘 드려오던 민족절기 예배 중의 하나로 3.1절 기념예배와 함께 광복절 기념예배를 드리면서 성찬식을 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디아스포라 한인이민교회 교인으로서 역사의 주체인 하나님의 주권 아래 세계 속의 코리안 어메리칸(Korean-American)의 정체성을 함께 공유하며 사명적 긍지를 가지고 일체감을 다지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민족의 기념일과 기념주일 때마다 부르는 대한민국의 애국가는 기독교인으로서 근대 개화기의 지도자였던 윤치호가 1896년 독립문 정초식에 사용할 창가 가사를 지어, 애국가 및 독립협회가로 유명한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곡에 맞춰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애국가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겨레의 아픔이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에 피로 물든 이후 민족사랑에 대한 애타는 마음으로 민중들에 의해 퍼져가기 시작했습니다. 1907년 찬미가에는 전체가 15장에 불과했지만 찬송곡 외에도 이 애국가와 황제송이 들어 있었습니다. 민족애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은 이 애국가사는 1919년부터 상해임시정부에서 국가로 지정됐습니다. 그러던 중 안익태가 새 애국가가 삽입된 ‘코리안 판타지아’라는 교향곡을 작곡했으나, 일제시대에는 샌프란시스코의 대한국민회에서만 제창됐습니다. 해방 후 그의 친구였던 배민수 목사가 귀국하면서부터 신애국가로 점점 퍼져 나가게 됐습니다. 마침내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에 맞추어 현재의 안익태 곡에 맞추어서 국가로 연주하게 됐습니다.
올림픽 때 한국선수들이 금메달을 목에 걸때마다 울려 퍼지는 애국가는 실제로 올림픽 경기에서 처음 불려졌습니다. 1936년 8월 1일, 베를린올림픽의 개막식이 끝나자 당시 일본대표로 참가했던 한국선수들은 나라 없는 설움 속에 슬픔을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올림픽이라는 명예로운 대회에 참가했지만 일본 국기를 달고 뛰어야했던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마라톤 3위 남승룡 및 김용식, 이규환, 장이진 선수들에게 달려온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미 한국 독립군과 민초들에 의해서 ‘올드 랭 사인’에 맞추어서 불려지고 있는 애국가를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에 맞추어서 ‘대한응원가’로 부르자던 안익태라는 젊고 유망한 작곡가였습니다.
안익태는 베를린올림픽이 열리기 5년 전인 1931년 LA를 방문하던 중 한인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됐습니다. 교인들이 스코틀랜드 민요의 이별가로 알려진 ‘올드 랭 사인’에 맞추어 구슬픈 곡조로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보고, 피 끓는 스물다섯 살의 애국청년은 애국가를 작곡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안익태는 애국가의 악상을 얻기 위해 세계 40여 국의 국가를 수집해 5년 동안 작곡을 거듭한 끝에 1936년 6월 마침내 마지막 장을 완성하게 됐습니다. 드디어 1936년 8월 1일, 그해 마침 독일에 머물고 있던 그는 베를린올림픽의 개막식 소식을 듣고 이 곡을 ‘대한응원가’로 명명했습니다. 그 애국가가 오늘날 우리들이 장엄하고 엄숙하며 뜻 깊게 부르는 애국가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보듯이 한국 기독교와 한인 이민교회는 처음부터 애국애족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었습니다. 일제의 강제협약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한일합방 국치일(1910년 8월 29일)을 전후해서 삼천리 방방곡곡 그리고 미주한인사회의 교회마다 태극기를 걸어놓고, 애국가를 부르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한국은 놀라운 모습으로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으며,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대한민국은 지구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로 성장했습니다. 해외 한인 700만 디아스포라는 1세 뿐 아니라 2세, 3세까지 조국의 뿌리와 민족적 자긍심을 가진 세계인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세워가기 시작했습니다. 정보산업, 자동차산업, 선박산업, 그리고 연예, 오락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능력과 지도력은 21세기를 맞아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후손인 코리안 어메리칸인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변화요 발전입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룩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중론입니다. 건국부터 공산주의에 반대해서 자유민주주의를 택했고 시장경제체제를 받아들여 자유경쟁제도를 수립했으며 세계의 강대국인 미국과의 교역과 동맹 강화를 통하여 안보를 확고히 했으며 개방적인 무역을 함으로 수출을 통한 경제개발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한국인들의 높은 교육열과 부지런한 노동력, 그리고 빠르고 통찰력 있는 판단력과 숙련기술, 그리고 첨단 과학기술 등이 이 모든 요건들을 이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더 나아가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중요한 사실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역사의 주체이시고 인간의 삶을 인도하시며 인류의 평화와 정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는 기독교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했습니다. 일제의 압박에서 시작해서 대한민국 건국으로부터 6.25동란으로 이어지는 민족의 아픔, 그리고 군사독재 앞에서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쏟고 남북한의 평화통일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한국교회와 해외 한인 이민교회들의 공헌을 결코 가볍게 치부할 수 없습니다. 한국 근대사를 볼 때 기독교가 근대화의 통로가 되어 서구문명을 소개했고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전 세계에 일본의 압제를 알리며 독립운동을 했으며 공산주의에 대항해서 자유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평화와 정의를 세우는데 앞장섰던 것이 우리 선배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위대한 신앙의 역사적 전통과 아름다운 희생의 얼을 물려받았습니다. 우리의 몸이 이곳 미국 땅에서 조국 땅을 떠나 흩어진 디아스포라로서의 삶을 살지만 우리 누구도 아무리 세월이 흘러 대를 이어가도 우리가 대한민국의 뿌리를 둔 코리안어메리칸으로서 세계인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류의 역사를 다스리시며 한 개개인의 삶을 주관하시는 역사의 주체자이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는데, 우리가 가진 민족의 뿌리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믿음을 값지고 힘있게 해줍니다. 광복 65주년과 한국동란 60주년의 해에 한민족의 후예로서의 우리 개개인의 인생과 디아스포라 한인 이민교회의 사명을 민족의 역사 앞에서 새롭게 비추어 보아야할 것입니다.
일찍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민족의 재건을 꿈꾸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래한 시편 126편은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였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를 남방 시내들같이 올려 보내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고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