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있는 삶, 행복
이 땅에 오래 사는 것만이 축복이며 복을 누리는 것일까? 그렇다면 남의 장기를 밀매해서라도 무조건 오래 살면 축복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맞지 않다고 이구동성 답을 한다. 일백년을 살든 천년을 살든, 성경에 가장 오래 살았던 므두셀라와 같은 자라도 인생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면 그 삶은 행복과 거리가 멀다.
태어나자마자 하나님이 데려가시는 어린 아기의 생명도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기에 하나님이 불러 가시는 것이다. 육신적으로 안타깝지만 원하는 만큼 장수를 누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나라에 가는 것이라면 너무 오래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내 생명부터도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인생에 사용권과 관리권만 있을 따름이다. 원 소유주이신 하나님께 드려지고 쓰임 받는 것만이 아름답다. 단순한 생명연장을 위한 삶은 참 성도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그런데 이런 당연한 사실들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조차 실제 삶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알 듯 모를 듯하다. 교회 안에서는. ‘저는 이 땅에 아무런 미련이 없습니다. 오직 영원한 세상만 바라보고 살아갑니다’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실제 삶은 오히려 이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 삶의 일들을 선택하고 경영한다.
드라마나 영화, 신문의 정치인들이 하는 이야기의 결론과 다를 바가 없다. 세상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 땅이 전부다’라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그러다보니 이 땅에서 실패하면 모든 것이 실패라고 본다. 그래서 저들은 영혼의 존귀함이나 삶의 의미를 따지기보다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상의 것을 위해 애를 쓴다. 왜? 이 세상에서 반드시 돈도 벌고, 반드시 권력을 누리고, 반드시 성공해야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단한 유혹이다.
이 유혹이 얼마나 대단한 지, 영원한 세상만 이야기하는 목회자들까지도 쉽게 넘어지는 것을 본다. 땅의 유혹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가? 보고 듣는 것이 문제다. 영원한 천국은 눈에 보이지 않고 육신의 귀로는 하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감의 유혹, 영혼의 만족
이처럼 천국은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데 사람의 오감을 만족시킬 것은 이 땅에 너무 많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오감의 만족을 넘어서서 영혼의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영원을 꿈꾸며 늘 하나님과 연결통로를 열어두고 살아간다.
그래서 영혼의 양식인 말씀과 성령의 생수를 맛보지 않고서는 결코 배부르다 말하지 않는 존재가 이들이다. 그래서 아무리 시커먼 세상의 홍수물이 밀려와도 나의 영혼의 샘에서 항상 깨끗한 물이 흘러넘치도록 몸부림친다. 항상 최선의 것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임을 아주 분명하게 잘 알고 있기에 영혼의 만족이 있기까지 아버지 집을 떠나지 아니하고 사모함으로 은혜의 샘물을 마음껏 맛본다.
땅의 일과 허망함
영혼의 만족을 구하지 못할 때, 자연히 땅의 것을 구하며,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인생을 항해한다. 마침내 그 끝의 허망함을 드러낸다. 성경에 나타난 사울왕의 마지막 비극은 성도로서 그 삶을 경영해 나가는 일들에 잔뜩 긴장하게 한다. 그 인생의 끝이 너무 잔인하고 처참하다. 하늘의 하나님께 속해 살아야 할 이스라엘의 왕이 땅의 것을 부지런히 구하고 찾았다. 영혼의 만족을 구하고 살면 나머지를 다 책임져 주셨을 텐데 스스로 하나님의 주실 것을 가지려 했을 때에 마침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빈손인생으로 비참하게 버림받았다.
한날한시에 길보아산에서 자신과 그 아들 셋이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블레셋 사람이 그의 머리를 베었고 머리가 잘린 벌거벗은 시체는 벳산 성벽에 걸었다. 그의 갑옷은 블레셋 온 지역으로 조각난 채 보내졌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왕의 시체가 이방인의 손으로 성벽에 전시되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한 수치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행위이다.
아주 잔인하다. 실제 목이 잘린 벌거벗은 시신을 가지고 어떻게 벳산 성벽까지 이동을 했을까? 생각해보면 그 비참함에 눈이 절로 감겨진다. 그 길은 개울이 흐르고 황무지 같이 거친 지형을 지나야 한다. 아마도 죽은 짐승을 끌고 가듯이 질질 끌고 가지 않았을까? 그 피투성이 된 시체를 성벽에 전시한다고 생각해보면 아주 잔인하다는 생각과 함께 가슴 뜨끔한 느낌이 돋아난다. 하나님이 버리시면 인생이 얼마나 비참해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끝이 한결같지 않은 사람, 갈수록 더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예비하신 복인데, 지금은 볼품없어 보이는 원석이어도 정금이 되어가야 하는 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에도 인생은 그 복을 누리지 못한다.
끝이 좋은 인생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힘들고 어려웠을 때는 ‘주여,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고백하고 간증한다. 그러나 돈 벌고, 집사고, 차사고, 어카운트에 밸런스가 여유로워지면 어떻게 되는가? 엉터리 같은 이야기를 한다. ‘목사님 조금이라도 힘 있을 때 일하고, 나이 들면 교회 꼭 붙어서 새벽기도도 하고 충성하겠다’고 말한다. 인간 목사는 속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속지 않으신다. 먼 훗날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펴놓고 이야기할 때, 마이너스 인생이 되고 말 것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월의 연한이 더해 간다는 것은 천국본향이 가까워짐을 의미한다. 본향이 가까울수록 노년이 행복하고 영혼이 강건하고 복 있는 사람의 삶을 살고자 하면 늘 방향을 잘 정하고 살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 쪽을 향하여 하나님께 붙어사는 것이다. 교회와 함께 살아내는 것이다. 왜 이것이 정답인가? 세상에 할 일도 많고, 세상에 값지고 보람된 일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만이 정답인가? 마지막 본향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 이 땅의 부귀영화 명예장수와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순례자이다. 그리스도인 모두 예외 없이 하나님의 집으로 간다. 아버지 집으로 간다. 그렇다면 그 집의 주인이신, 천국집의 주인이신 그분이 기뻐하는 일을 하며 이 땅을 살아야 한다. 그것만이 그 나라에 이를 때에 칭찬과 영광과 상급, 기쁨을 얻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집착과 실패, 맡김
사울왕은 왜 그랬을까? 성령도 알고 예언도 하는 영민한 왕이었는데 말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강한 집착 때문이다. 바람에 훅 불면 날아가 버릴 진토와 같은 먼지를 영원할 것처럼 붙들고 살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가 붙들고자 했던 ‘왕권, 권력, 명예’, 붙잡고 지키려 했지만 먼지처럼 그 손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자신조차 지키지 못하는 인생결말을 보았던 것이다. 원래 잡을 수 없는 것인데, 무지하였기 때문이다. 세상의 것은 잡으려 하면 잡을 수가 없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들 중에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하고 심지어 자기 자식하나도 지켜주지 못하는 못난 아비의 인생이 되고 말았다.
단순하게 맡겼더라면 하나님이 지켜주셨을 것이다. 자신과 자녀와 가정과 가문을 살리는 은혜의 통로가 열렸을 것이다. 오늘날 자녀와 생업과 세상의 일들에 잔뜩 집착하는 이들이 많다. 결국 아무도 행복하지 못하다. 진정한 복이 되지 못한다. 열매가 없다.
집착과 몰락, 징조와 예언
성경 사무엘상의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사울 가문의 끝은 한마디로 ‘집착과 몰락’이다. 그렇게 자신의 왕권을 향한 집착과 아들에게까지 물려주기 위한 고도의 정적 제거활동들이 허망하게 끝나는 대목이다. 한날한시에 어떻게 한 가문이 이처럼 몰락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징조가 있었고 예언이 있었다.
신실한 아들 요나단의 만류와 두 번에 걸친 목숨을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으며 심지어 무당의 입을 통해서도 그와 아들의 죽음소식이 귓가에 들려졌다. 은혜도 받아서 눈물도 흘리고 너무 충격적인 소식에 기진맥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징조와 예언들 앞에 그는 그가 살 수 있는 딱 한 가지를 하지 못했다. 듣고 돌이켜 회개할 줄 몰랐다. 수많은 회개의 기회를 이리 저리 짓뭉갰다. 자신의 생각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의 음성과 징조와 예언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지 못했다. 결국, 마지막 그에게 돌아온 것은 자신만의 패망이 아니라 함께했던 모든 이들의 동시몰락이었던 것이다. 공동체의 공멸이었다.
깨닫지 못하는 짐승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특히 한국 북한, 미국, 세계 가운데 높고 높은 리더의 자리에서 권력에 집착하는 이들에게 이런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자신의 존귀함을 다 내어버리고 이전투구에 너무 열심이다. 패거리 진영논리 앞에 옳고 그름이 없다. 죽고 죽는 것은 백성인데 백성들도 그 리더를 따라 또 나뉘어진다. 집착이다. 집착의 끝에 개인과 공동체는 공멸한다. 북한을 위해 본 교회는 공예배마다 기도한다. 미국의 대통령과 선거 정치 지도자들을 위해서도 공적으로 기도드린다. 함께 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가을에 여름한철 푸르른 잎들도 때가 되매 모두 겸손히 떨어져 낙엽이 되고 거름이 되어 또 다른 새날의 푸르름과 열매를 준비한다. 대 자연의 이 질서 앞에 좀 더 단순해지기를 바래 본다. 모든 것이 다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한 삶만이 영원할 것이다. 이것 외에는 더 집착할 것도, 생명을 바칠 만큼 간절할 것도 없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하나님 앞에 이 세상을 위해 사랑하는 조국과 동포 북한과 미국을 위해 기도하는 일에 더 집착하고 싶을 뿐이다. Simple Life, High Spirituality.
davidnjeon@yahoo.com
09.26.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