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메시지


빼앗긴 죽음에도 부활은 오는가?

양수철 목사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지금 우리가 처한 형편이 마치 일제 강점기와 같습니다. 빼앗긴 들과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 놓고 외출을 할 수도 없고, 마음 놓고 만나서 말할 수도 없고, 억압에 묶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매 마침내 광복을 맞이하고 대한민국이 탄생했듯이 아무리 족쇄와 같은 시기라고 할지라도 부활주일은 반드시 옵니다. 

이번주일은 2020년도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은 우리 신앙의 최고봉입니다(고전15:13-15). 죽음과 부활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면 천사가 나타나 하나님의 계획을 예고하는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수태고지(受胎告知, Annunciation)이라고 하는데, 성경에 총 17번 나타납니다. 그런데, 예고는 대개 누구의 태어남을 통보할 때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또 다른 탄생기사(수태고지)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Tomb’가 ‘womb’가 되는 사건입니다. 한국말로 해서 ‘무덤’이 ‘자궁’이 되는 사건이 바로 부활입니다. 그래서 혹시 부활의 사건을 남자들에게 먼저 보여주시지 않고 여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은 아닐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 4장 6절에서 한 말 중에 ‘떠난다’는 단어가 헬라어로 ‘아날뤼시스’인데, 묶여있던 배가 출항하기 위하여 밧줄을 풀 때에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은 무엇입니까? 미래의 세계로의 여행이지요. 그런데 여행가는 사람이 우는 것 보셨습니까? 롱비치항에서 유람선이 떠날 때 닻줄을 풀면 사람들은 환호하면서 손을 흔들고 기쁨이 충만합니다. 

우리의 죽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육신 장막을 벗는 날, 우리는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고전15:42-44)입니다. 이것을 믿으시면서 소망을 가지고 승리하시고 서로 위로하시기를 바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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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기성 목사 
(해외한인장로회 총회장)

부활의 기쁨의 온 성도님들의 가정과 교회와 나라위에 충만하기를 소원하며 부활의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먼저 죽음이 끝이라는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전15:32b) 그렇습니다. 사람 중에 가장 무서운 사람이 있다면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두 가지의 사고에 쉽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하나는 ‘죽여서 문제의 해결을 보겠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이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 인생은 폭력적으로 변해가고 근시안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다른 하나는 ‘나하나 죽으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은 사람을 무책임과 쾌락주의, 그리고 정신적인 허무주의에 빠지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니까 인생을 함부로 삽니다. 살인, 폭력, 이기적인 생활, 오직 자신 밖에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얼마나 불쌍한 인생입니까? 이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부활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야 하는 것은 죽음의 문제는 회피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가 가진 가치관에서 비롯되며, 한 사람의 가치관은 그가 가진 내세관에서 만들어집니다. 무슨 말일까요? 그리스도인이 바른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의 인생을 살려면 부활신앙에 기초한 바른 내세관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활은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믿으면 그리스도인이고 안 믿으면 비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기독교에서 부활을 빼면 기독교가 아니듯 그리스도인에게서 부활신앙을 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썬다 싱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한 대학교수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이 오랫동안 믿어왔던 힌두교를 버리고 예수를 믿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즉 힌두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이기에 신앙을 바꾸었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썬다 싱은 분명하면서도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예수가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우리는 인생의 기초를 부활신앙 위에 두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부활신앙의 기초 위에서만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변화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부활신앙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는 이 부활의 아침이 되기 바랍니다. 

온 세상이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어둠속에 있는 것처럼 방황하는 이때에 부활의 주님을 새롭게 만나며 변화되는 귀한 삶이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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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코로나(Corona)와 가시관의 싸움…

양민석 목사 
(뉴욕교협 회장)

부활절은 코로나와 가시관의 싸움이 얽혀있다. 코로나(Corona)는 라틴어로 왕관을 뜻한다. 예수님은 당시 코로나(왕관)를 쓴 자들로 인해서 고난을 받으셨다. 예수는 태어난 직후 코로나를 쓴 헤롯의 살해 위협에 애굽으로 도피를 해야만 했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종교적 코로나를 쓴 대제사장의 무리들로 인해 질시와 모함을 받았고, 끝내는 빌라도와 같은 권세자들과 결탁하여 십자가를 지게 되셨다. 

십자가를 지는 예수의 머리에는 권세자들의 코로나가 아니라 가시관이 씌워져 있다. 예술적인 무늬나 모양도 없이, 찬란히 빛나는 권위의 영광도 없이, 살을 뚫고 들어간 가시관은, 붉은 피빛으로 물들어 잔인한 고통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벌겨 벗겨진 몸에 씌워진 가시관은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가 그린 에케 호모(Ecce Homo-이 사람을 보라)처럼, 군중들의 조소거리가 되어 더욱 초라한 예수의 모습일 뿐이다.  

결국, 예수는 코로나를 쓴 사람들로 인해서 가장 잔인한 십자가형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가시관을 쓴 예수는 코로나를 쓴 자들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그와 그를 따르던 제자들까지도...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까지도... 모두 다 파산토록 해버렸다.  

이것은 육적으로는 코로나를 쓴 교만한 권세자들의 승리요, 영적으로는 죄와 죽음의 코로나를 쓴 죄의 아비 사탄의 승리였다. 예수의 시신은 곧 무덤에 갇혀버렸고, 인류의 소망의 역사는 거기서 정지되었다. 

하지만 단 사흘뿐이었다. 가시관을 쓰신 예수가 굳게 닫힌 무덤의 문을 열어 제쳐 버렸다.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고, 흉내낼 수도 없고, 가능할 수도 없는 죽음의 정복사건을 단 3일 만에 예수의 부활로 이루어 놓았다. 그렇게 거창하고 당당하게 코로나를 쓴 자들이, 가시관을 쓴 예수에 의해, 완전패배를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죽음의 정복자로 가시관 쓰신 분 앞에 더 이상 당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부활절은 코로나를 쓴 자들과 가시관을 쓰신 분의 싸움에서 종지부를 찍는 날이다.

결론은 가시관의 승리다. 가시관을 쓰신 분을 따르던 사람들의 승리요. 가시관에서 흘러나와 십자가 아래로 떨어지는 그 핏방울 밑으로 모여든 사람들의 승리다!! 회개의 눈물로 시작하여, 사명의 눈물로 예수와 함께 피 흘려 살았던 그 사람을 위한 완전한 승리다(롬8:35-47)!

지금 왕관을 쓴 코로나바이러스19 판을 치며, 두려움의 재를 뿌리고, 사망의 천을 덮으려한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가시관 쓰신 분, 그 품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야만 한다! 한없는 겸손과 사랑과, 거룩의 품으로 돌진하여 무릎을 굻고 당신의 피로 나를 적셔달라는 목마름으로 외쳐야한다! 그리고 한 번 더,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능력이, 오늘 나와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 힘있게 흘러가도록 기도하자! 

바로, 예수의 가시관, 예수의 피, 예수의 십자가는 코로나를 이긴 승리의 면류관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그 능력을 믿는다.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지금 여기 우리 한 가운데 계시기에, 우리는 이 처절한 생명의 싸움에서 승리할 것을 믿는다. 

서로 사랑하자, 서로 믿음을 격려하자, 서로 더 겸손하자. 부활하신 주님을 힘차게 찬양하며 크리스천 의담대함을 보여주자,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며 위기의 땅을 이전보다 더 아름답고 은혜로운 생명의 땅으로 바꾸어 가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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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이기는 예수 부활의 능력 

진유철 목사 
(순복음세계선교회북미총회 총회장)

할렐루야! 부활의 아침,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승리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모든 성도님의 가정과 교회에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지금 온 세상은 코로나바이러스19의 공포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평범하고 정상적인 삶에도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여러 위기 앞에서도 부활절이면 온 교회가 하나 되어 연합예배를 드리던 전통도 올해는 이어갈 수 없게 됐고 성도들은 교회에 오지도 못한 채 집에서 온라인으로 부활주일예배를 드리게 됐습니다. 그러나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약속하신 예수님은 우리 삶 한복판에서 여전히 우리의 고통과 함께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사망의 권세를 완전히 부서뜨리신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계시기에 코로나19가 가져다주는 두려움과 고통에서도 우리를 능히 구해내시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분이심을 믿습니다. 

2천년전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함께 구약성경에 이미 예언돼 있었고, 예수님께서도 직접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마20:19)고 일러 주신대로 정확히 그날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 승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승리에도 불구하고 변화되지 않은 것,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후 여전히 슬퍼하며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약속대로 부활하셨는데 제자들은 아직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확실한 ‘역사적 사건’이지만, 그 부활의 능력은 오직 믿는 자에게만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20장 18절에 따르면 부활을 믿게 된 막달라 마리아는 이 사실을 두려움 없이 전파했지만 부활을 믿지 못한 제자들은 바로 그다음 구절인 19절에서 두려워 숨어있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 삶에 역사하려면 반드시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요11:25-26). 코로나19의 공포가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대로 승리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승리에도 불구하고 변화되지 않은 두 번째는 상황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을 믿은 후에도 주변상황은 그대로였습니다. 여전히 살기등등한 태도로 복음을 방해하려는 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상황을 바꾸어 주시지 않고, “성령을 받으라”(요20:22)고 하십니다. 예수부활의 영이신 성령님이 함께하시면 상황과 상관없이 모든 문제를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의 아침,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셨지만,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신 분(롬4:25)이십니다. 이 부활을 믿는 자가 되어 성령님과 함께함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하는 부활의 증인되시길 기도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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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승리

이준성 목사 
(뉴욕목사회 회장)

세계는 지금 코로나19으로 팬데믹 상태에 있습니다. 변화가 예상되는 펜데믹 이후의 크리스천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첫째,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e)는 직장의 변화를 몰고 오고 인간성 상실의 징조가 보이며 자신 위주의 가치관의 변화가 예상됩니다.

둘째, 마스크 착용, 씻기 및 소독관리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자기 틀에 갇힌 인간으로 관계망이 변화할 것이며 접촉에서 불가접촉으로 사회질서의 변화가 예상됩니다.

셋째, 통신기계와 SNS 발달은 급속한 개인주의와 접촉이 뜸한 배달업종이 대세를 이룰 것이며 이 현상이 지속되면 선악의 기준이 뒤틀릴 것이다.

넷째, 공권력 강화는 개인의 자유나 종교의 자유, 각종 모임의 제한 등으로 인종차별이 심화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펜데믹과 부활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이 펜데믹은 부패한 인류 아담의 후손이라는 진리를 선포하고, 부활은 펜데믹을 치료할 마지막 수단이라는 점입니다. 펜데믹이 한 사람 아담이 가져온 죽음(롬5:12)이라면 부활은 또 한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온 생명(롬5:18)입니다. 

3일만의 부활! 주님의 부활 의미는 사망에 대한 생명의 승리이며 악에 대한 선의 승리입니다. 그리고 세상 나라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우리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때 그 부활의 능력은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도 동일한 능력이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묵은 들에 새싹이 나고, 죽은 듯 보이는 나무에도 꽃송이가 피듯, 연약한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일평생 계속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혹자는 사도행전을 성령행전, 말씀행전, 전도행전(5:42)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십자가와 부활행전”입니다. 20번 이상이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언급한 사도행전을 그대로 받는다면 예수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팬데믹에 두려워 말고 부활을 통하여 펜데믹을 이겨내시는 시대적 사명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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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다시 사셨습니다

장동신 목사 
(뉴저지교협회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죄와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2020년 부활절 아침에 이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모든 뉴저지한인교회와 온 성도님들께 임하시길 축원합니다.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세계적 전염(병)으로 뉴저지는 물론 온 세계가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이 모이는 모임을 가질 수 없으며 부활절 새벽예배를 예년과 같이 함께 모여 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온라인과 또는 미디어를 통한 방식의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소식은 온 세계에 선포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말씀하신 하나님의 기쁨인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주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주님의 부활하심은 부활의 첫 열매(고전 15:20)이며 장차 우리가 누릴 소망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한 이 때에 부활절을 맞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로 이기게 하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욥의 고백처럼 이 시간이 지나고 정금처럼 단련된(욥23:10) 우리들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부활신앙과 믿음을 견고히 합시다.

주님 다시 사셨습니다. 

 

04.1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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