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한국의 장자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가 평양신학교를 시작으로 하여오다가 언제 분열되고 갈리게 되었는지요?
-LA개혁신학교의 Lee
A: 좋은 질문입니다. 장로교인이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의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설명은 역사신학자인 오덕교 교수의 장로교회사와 박용규 교수의 단편 글을 많이 참고하였습니다. 평양에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가 1901년 5월 15일에 개교하고 1907년 9월 17일에 조직된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시대를 거쳐 1912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1932년부터 시작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한국교회를 시험대에 올려놓았습니다. 계속된 신사참배 강요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일명 ‘평양신학교’)가 1938년에 폐쇄되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38년 제27차 총회에서 자진하여 신사참배(우상숭배)를 가결하고 시행함으로써 배교행위를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1938년 10월 24일 한상동 목사가 부산 초량교회(草梁敎會)에서 총독부는 “정의 및 신의에 위반한 우상인 신사참배를 강요하니 오등은 굴하지 말고 이것에 절대로 참배해서는 못쓴다”라는 설교를 했고 이것이 훗날 한국교회의 역사적 신앙고백에 기초한 고려파의 시초가 된 것입니다. 고려파는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신사참배자들에게 회개하고 근신할 것을 주장하자 친일파였던 김길창과 김관식은 신사참배 죄를 회개하는 대신 합리화 하는데 급급하였습니다. 교권주의자들의 횡포에 실망한 한상동과 주남선 목사는 1946년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고 청교도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전파함으로서 교회를 재건하려고 하였습니다.
1953년에는 김재준 목사의 자유주의 신학문제로 교회분멸이 있었습니다. 김재준은 성경의 완전영감을 부인하고 사상적 영감을 주장하면서 한국교회의 보수주의 신학에 도전하였습니다. 장로교 총회는 1951년 김재준의 조선신학교 직영을 취소하고 1953년에는 그를 정죄한 후 목사 면직에 처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교회를 이탈하여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조직하여 다시 교회분열이 이루어졌습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함경도지역 중심으로 일어난 교회분열입니다.
고려파와 기독교장로회의 분열이후에 한국장로교회는 1959년에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문제로 제3차 분열을 경험하였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는 경기노회 총대권 문제와 세계교회협의회 가입문제로 혼란을 거듭하다가 증경총회장단의 제의로 11월 24일까지 정회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임원불신임안을 제출한 후 서울에 올라와 연동교회당에서 회의를 속개하고 총회를 구성함으로 제3차 교단 분열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총대들은 법대로 11월 24일에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회의를 속개하였습니다. 승동측은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자유주의 신학과 공산주의자들을 인정하므로 그에 가입하는 것은 배교행위와 같다고 주장하였으나 연동측은 세계교회협의회에 참석하여 시대적인 조류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합동과 통합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04.10.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