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석 목사 (NY 부르클린 제일교회)
8. 사적인 예배에 대하여 유의할 사항
우리는 개인적인 예배에서 큰 은혜를 받는다. 개인적인 사건에 성령의 위로하심과 더 많은 은혜를 받는다. 그에 비해 공예배는 지루함을 느낄 때가 많고 일방적이며, 별 감동이 없을 때가 있다. 그렇다면 공예배가 항상 더 소중하다는 말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적인 예배에 대해 잘 파악함이 필요하다.
1)모든 예배의 판단 기준은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은혜롭고 감동이 넘치는 것에 대한 판단기준은 항상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 개인의 경험은 늘 조심해야 한다. 말씀이 뒷받침이 되지 않는 경험만을 앞세우는 것을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감각에 의존하여 사는 사람들은 느낌을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잡는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감각을 따르는 우리의 판단은 종종 빗나간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성경에 어긋나는 경험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경건 시간이 더 은혜로울 수 있지만 항상 그러한지를 생각해야 한다.
2)개인의 경건시간에 누리는 특수한 것을 보편적인 진리로 인정할 수 있는지 고려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경건시간에 누리는 즐거움이 크지만 그렇게 특수한 경우가 일반적인 규범이 될 수는 없다. 특별한 경우에 체험하는 경험들을 보편화하기는 어렵다. 공예배가 은혜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성도들이 함께 모이는 교회의 공예배에 참여하지 않고 집에서 혼자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개인적인 경험은 스스로 속을 수도 있다. 거짓된 원칙에서 비롯되는 풍성한 기쁨과 성취가 있을 수도 있다. 또한 그것이 덧없이 흘러가는 번쩍거림이 있을 수도 있고, 쉽게 사라지고 마는 일시적인 감정 요소들이 심령 안에 있을 수도 있다. 그것들이 다 위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릇된 웃음과 그릇된 환상을 믿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꾸밀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영적인 임무를 수행할 때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라 다른 것들에 의하여 더 무게 있게 움직이더라도 거기에 활력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일들은 어둠의 영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그와 같은 일들을 벌일 수도 있다(고후11:14)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점을 늘 기억하며 성도들의 경험을 점검해야 한다.
3)특별하고 예외적인 원칙이 일반적인 원칙을 폐할 수 없다. 성도들은 개인적으로 초자연적인 일을 경험하며 주님께서는 간혹 그러한 일을 행하신다. 그러나 그런 초자연적인 일들은 일반적인 원칙에서 벗어나는 예외적인 것들이다. 그런 예외가 일반적인 규칙을 제한할 수 있지만 무시하지는 않는다. 특별한 은혜를 경험한다고 해서 공적인 예배를 무시할 수는 없다. 공적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즐거워하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이므로 공예배를 더욱 사랑하는 것이 성도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4)개인적으로 체험하는 은혜는 공예배에서 하나님을 사모한 마음의 열매일 수 있다. 개인적인 예배에서 발견되는 보충적인 은혜와 더 확장되는 은혜, 그리고 주님을 향한 더 깊은 애정의 표현들은 공예배의 결과들로 나타나는 것들이다. 공적인 예식이 주는 유익들은 공예배 시간에 전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날이 지난 후에도 그 후광이 나타난다. 예전에 참여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안 사람들은 이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 것이다. 공적 예배 시간에 주님께서 성도들을 만나주실 때 개인적인 시간에 느끼는 것보다 심령이 더 많이 감동하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이렇게 공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앙망하는 열매들이 개인적인 교제시간을 갖도록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공예배를 무시하기보다 오히려 존중히 여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5)공예배에서 하나님을 더욱 즐거워하게 된다. 공예배에서 하나님을 더욱 즐거워하게 되지만, 그러나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된다. 개인적인 경건의 시간에만 하나님을 더 즐거워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심령이 가난하고 겸손한 영혼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 떨며, 그리스도를 갈망한다. 그것이 자신의 부패와 타락으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영적 갈급함과 애통함의 표현이다. 주님을 더 많이 즐거워할 수 있기를 열망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가난한 심령과 굶주린 심령이 있는지를 보신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겸손히 갈망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온다면, 반드시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공적인 모임들을 통해 그렇게 하시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시66:1,2).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며,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위로가 그들의 것이며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나니 배부름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5:3-6).
6)개인의 유익보다 공적인 유익인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해야 한다. 공예배는 공적으로 더 교화적이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유익을 준다. 일반적으로 공공의 유익보다 개인의 유익을 더 선호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듯이, 영적인 삶에서도 개인적인 시간을 공적인 시간보다 우선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주님께서도 특별한 상과 더불어 그러한 자세를 요구하시며 권장하신다. 개인적인 경건시간에 더 많은 유익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성도는 개인적인 유익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영광이 어디에서 가장 크게 드러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공예배 시간에 더 많이 드러난다. 공예배 시간에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임재하신다. 그분의 영광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공예배이다. 그 시간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적인 시간보다 공적인 시간을 더 선호해야 한다.
7)공예배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지 못할 때 개인의 잘못을 점검해야 한다. 성도가 왜 성경적인 바른 공예배가 집전되는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즐거워하지 못하며 영적인 유익을 더 많이 얻지 못하는가를 다음과 같이 분석해보고 진단해볼 필요가 있다.
(가)공예배 자체의 문제도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죄악된 행위들이 영적 유익을 차단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성도 자신에게 비난받을만한 요소가 있는지 자신의 상태를 살펴야 한다. 공예배의 탁월함을 문제삼기보다 자신을 먼저 점검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여호와의 손이 짧은 것이 아니라 우리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민11:23; 사1:15). younsuklee@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