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순 목사 (충신교회 원로)
목회자의 건강, 교회와 목회건강의 중심축(가)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식생활의 균형을 지키기가 어렵다. 필자의 경우 아침식사는 힘들고 피곤하고 입맛이 없다는 핑계로 건너뛰기 일쑤였고, 점심은 때 지난 후 먹거나 대용식일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저녁식사는 잠자리에 들기 전인 늦은 밤에 먹곤 했다. 깨어진 식생활의 리듬이 반복되다가 1999년 4월 위 절제수술을 받았다. 병 원인은 여러 가지가 복합되었겠지만 불규칙한 식생활과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고 본다. 암 선고를 받는 순간 당사자에게 일어나는 심리기전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이건 오진이야’라는 강한 부정의 단계, ‘왜 내가 암이야? 내가 뭘 잘못했어?’ 의사와 병원이 밉고, 암 원인을 제공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환경과 사람들에 대한 원망, 그 단계를 지나면 ‘살길이 없을까? 특효약은 없을까?’ 약을 찾고 비법을 찾고 의사에게 매달리는 단계,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등 복잡한 단계를 거치게 된다고 한다. 1999년 4월 2일 성금요일 아침, 필자를 만난 담당의사와의 대화이다. “목사님이시니까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암입니까?” “예, 위암입니다. 빨리 입원하고 수술하셔야 합니다.” “수술할 시간이 없는 데요. 2-3년 스케줄이 잡혀 있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다 취소하시고 빨리 서두르셔야 합니다.” 필자에게도 ‘내가 왜?’라는 심리기전이 일어났다. 그러나 성금요일 예배 인도를 위해 교회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감사해야지. 감사의 조건을 찾아야지’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 안에서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의 문을 열고 감사의 조건을 찾기 시작했다. 물론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4월 4일 일체 내색하지 않은 채 부활주일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했다. 4월 5일 책상 정리며 서류들을 정리하고 남겨야 될 말들을 노트에 썼다. 그리고 4월 6일 입원했고, 그후 날짜를 정하고 수술대에 올랐다. 병상일지 맨 첫장에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대문자로 썼다. 그리고 감사한 일들과 감사해야 할 일들을 써 내려갔다. 놀라운 것은 써 내려갈수록 감사의 조건들이 샘솟듯 솟아나는 것이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어서 항암치료, 주사, 수혈 전혀 없이 입원한 지 보름 만에 퇴원했다. 퇴원하는 날 집도의인 김 박사가 필자에게 “목사님, 저는 기독교인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목사님을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축하합니다”라며 건넨 인사말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담임목사가 입원하자 온 교회는 기도의 도가니로 변했다. 금식과 철야기도가 뒤를 이었고 필자의 지인들이 전 세계에서 기도의 지원사격을 보내기 시작했다. 뉴욕, 시카고, 시애틀, LA, 밴쿠버, 토론토, 파리, 동경, 오사카, 북경, 상해, 로마, 밀라노, 제네바, 취리히, 비엔나, 모스크바, 알마티 등 전 세계 각처에서 기도의 함포사격이 이어졌다. “하나님, 우리 목사님 살려주세요. 꼭 가셔야 된다면 제가 대신 갈게요. 하지만 우리 목사님은 가시면 안돼요. 하실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으세요” 라는 충신교회 C장로의 기도 내용이 입소문으로 퍼지자 이 기도에 동참하는 기도 용사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제가 대신 갈게요’ 라는 사람의 수가 불어나기 시작하면서 기도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다. 수술 후 일주일 만에 걸어서 병원 문을 나설 수 있었다. 필자는 수를 셀 수 없는 사랑과 기도의 빚을 졌다. 지금도 생각하면 고맙고 감격스럽다. 수술 후 어느 날 K목사가 병실을 방문했다. 알리지도 않았고 청한 일도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그가 던진 말은 이랬다. “박 목사, 조심해. 우리 사촌 형도 2년 전에 이 병으로 수술 받고 1년 뒤 전신으로 퍼져 세상 떠났어. 조심해야 돼.” 누가 오라고 했나, 조언을 구했나? 너도 죽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그 망언(?)은 위로도 격려도 아니었고 기분 나쁜 기억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