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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허양희 사모

(텍사스 오스틴 주님의교회)

미국에 이민 온 지 만 이십칠 년이 되었다. 남편 학업을 위해 이민 가방 몇 개 들고 어린 아기 두 명과 함께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우리는 마련해 둔 보금자리로 가기 위해 낯선 이국적인 풍경에 어리둥절해하며 고속도로를 달리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만 해도 공부를 마치면 한국으로 귀국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시작한 이민 생활, 이민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가 될 줄은 전혀 예상도 못 한 채 쏜 화살 마냥 이십칠 년의 세월이 흘러버렸다. 

 

검은 머리카락이 수북했던 남편은 항상 숱가위로 머리카락을 정리를 해야 했지만 지금은 머리숱이 현저히 줄어든 흰 머리 가득한 채 지난 세월의 흔적을 이고 있다. 사업을 하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할 때만 해도 배우자를 위한 기도에 백 퍼센트 응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환호를 질렀지만, 결혼 이 년차에 하나님은 남편을 전적인 사역자로 부르시며 하나님의 온전한 뜻 안에 순종하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남편이 공부해야 할 신학교를 예비하시고 모든 유학 절차를 기적적으로 진행해 가셨다.

 

미국에 도착하여 주일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갔는데 누군가가 “사모님” 하며 불렀다. 그 호칭은 얼마나 생경하던지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렇게도 싫어했던 목사의 아내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 전 아무리 멋지고 훌륭해 보여도 신학생이라고 하면 아연실색하며 손사래를 치던 나였다. 그렇게 목회자 아내의 길로 접어든 후 사모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일학년 때 교회를 나가기 시작한 믿음의 일대인 나로서는 사모의 정체성이 확립되어 있지 않아 사역을 잘하고 계시는 선배 사모님들을 만나면 ‘사모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을 던졌고 그들의 말을 경청하며 사모의 정체성을 탐색해 갔다. 그리고 하나님께도 질문을 드리며 생각을 정리해 갔다.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른 후 하나님이 깨닫게 하신 것은 나는 나로서 의미가 있는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라는 존재 정체성을 인식하게 하셨다. 나는 다른 어떤 이처럼 될 필요가 없고 나를 이 땅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고유하고 독특한 사명에 충실한 그 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사모로서의 정체성은 역할 정체성으로 이는 존재 정체성이 먼저 확립된 후 그 바탕 위에 세워져야 한다. 결국 사모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가라는 존재 정체성을 하나님 안에서 먼저 확립하는 것이 중요함을 인지하게 했다. 

 

탈봇 신학교 교수였던 닐 앤더슨은 그의 명저인 <내가 누구인지 이제 알았습니다>에서 “자기 가치에 대한 평가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바르게 아는 데서 시작된다. 곧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 때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모든 그리스도인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된 자신의 신분에 대한 인식, 곧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 바탕이 확고할 때만이 거듭난 성도로서 영적 성숙의 삶을 힘 있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yanghur@gmail.com

06.10.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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