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가주 청교도 이주 400주년 기념 책자 저자
남가주행복찬교회담임
6)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의 청교도 혁명
청교도 혁명의 주역인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은 잉글랜드 동부의 케임브리지셔주 헌팅턴의 청교도이자 젠트리(gentry) 계급의 지주의 집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1628년에 하원의원이 된다. 1640년 의원으로 선출되었을 때 청교도를 지지했다. 크롬웰은 교황주의에 반대했고, 1641년 5월3일 하원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로마가톨릭을 공고히 하려는 사제단과 예수회의 구상에 대해 경계하고 이들의 참된 종교개혁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저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온 힘을 다해 전능하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황주의와 교황주의자들의 변신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롬웰(Oliver Cromwell)은 1644년에 교황제도와 감독제를 반대하는 ‘종교인들’이라는 신형군을 소집하여 네이즈비에서 찰스 1세가 이끄는 왕당군을 무찌른다(1648년). 그리고 프레스톤에서 찰스 1세를 돕기 위해서 남쪽으로 진군해가던 스코틀랜드 군대를 쫓아버린다. 1649년 크롬웰은 찰스 1세를 처형한 후 아일랜드를 정복하여 자신에게 예속시키고, 1651년에는 우스터에서 찰스 1세의 아들(찰스 2세)을 무찌른다. 이렇게 영국 내란(Civil War)의 종결 후 의회는 군의 해산을 요구하였으나, 크롬웰은 의회파 중에서도 국왕과의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 독립파에 속하여 타협을 구하는 장로파와 대립하다 결국 장로파를 추방한다.
이렇게 크롬웰은 의회에서 주도권을 잡았고, 1649년 5월에 잉글랜드의 최초이자 마지막 공화국인 ‘잉글랜드 연방’을 세웠다. 이후 크롬웰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 세 나라를 통치하는 종신 호국경(Lord Protector)의 자리에 오르고 죽을 때까지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다. 이 시기에 그는 귀족과 교회로부터 몰수한 토지를 재분배하고, 중등교육 육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대외적으로는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자메이카를 빼앗고 신흥강국으로 떠오르던 네덜란드를 두 차례에 걸친 전쟁을 벌여서 제압하고 해상권을 지배하는 업적을 세운다.
그러나 교황제와 감독제를 제외한 참 종교의 자유를 도입하려던 청교도적 노력은 독립파와 장로파의 갈등과 내분으로 큰 위기를 맞는다. 결국 호국경 크롬웰의 죽음 이후 1660년 찰스 2세(스튜어트 가문)의 왕정복고로 말미암아 실패했다. 잉글랜드교회사를 기술한 존 무어만(John Moorman)은 찰스의 죽음과 크롬웰의 집권에 대해 “전제 왕정은 나빴다. 그러나 군사독재는 더 나빴다”라고 평가했다.
이와 같이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하지만 청교도혁명의 주역 크롬웰이 의회 민주주의를 확립한 지도자였다는 것은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그 일례로 2002년 BBC에서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크롬웰은 영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10인 안에 들어갔다. 지금도 크롬웰 런던의 국회의사당(웨스트민스터 궁전) 정문 앞에는 갑옷 차림으로 검과 성서를 들고 있는 크롬웰(Oliver Cromwell)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7)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s)
영국 교회사가인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Hill)은 “17세기는 영국과 영국교회에 있어서 결정적인 세기였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세기인 17세기 중에도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가 열렸던 1640년대가 가장 중대한 시기였다”라고 정의했다. 찰스 1세의 엄청난 박해 가운데에서도 1640년경에 이르러서는 영국 내에서 청교도의 영향력이 일취월장(Day trip) 증폭 확장되어 절정의 황금기를 맞는다.
그 대표적 사건이 바로 청교도혁명이 진행 중인 1643년도에 교회개혁을 위하여 의회지도자들이 국왕 찰스 1세의 제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영국 교회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총회를 소집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s) 발의자는 영국 의회였다. 기간은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2월 22일이다. 총 참석자는 151명으로서 121명의 청교도 목사와 30명의 평신도 대표인데 10명은 상원의원, 20명은 하원의원이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 4명의 신학자와 2명의 평신도 대표가 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했다. 총회에는 장로파가 거의 대부분이었고 성공회와 독립파는 소수에 불과하였다. 총회 구성원들은 대부분 당대의 최고의 석학들이었다.
학자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총회 의장이며 사회자였던 트위세 박사였다. 그는 철학자 겸 조직신학자였다. 또 라이트 푸트와 콜만 박사는 동양학 학자였고, 가테커(Gataker) 박사는 신약과 고전 헬라어에 정통했다. 그리고 런던을 대표하는 설교자 구지(Gouge), 존 오웬(John Owen),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와 독립파 토마스 굳윈(Thomas Goodwin), 필립 나이(Philip Nye), 윌리암 브릿지(William Bridge), 제레미야 바로우(Jeremiah Burroughs), 온건한 입장을 견지한 자들은 레이놀즈, 칼라미, 에로스미스(Arrowsmith) 등이었다. 스코틀랜드의 회원 중에 헨더슨, 길레스피, 루터포드는 보기 드문 학자였다. 이처럼 총회에 영국의 대학자들이 모였는데 이는 지금까지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약 6년7개월간 무려 1163회 이상의 공식적이고 정규적인 신학모임을 가졌다. 이렇게 많은 시간이 든 이유는 성경에 기초한 교리적 발언을 무제한으로 허락하고, 모든 교리의 최후 채택은 만장일치제로 하였기 때문이다. 철저히 성경에 근거했다. 특히 사도적 가르침과 전통에 따라 오직 살아계신 주님과 교회 간의 유기적 상호결속을 강조했다. 신앙고백서를 포함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또한 성경의 가르침을 더욱 권위 있게 들어냈다. 그 결과 영국 교회의 행정 체제와 예배를 로마 천주교회의 잔재로부터 성경적인 교리, 예배, 교회, 정부 형태로 개혁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요리문답서, 소요리문답서 등등 개혁교회의 대표적 신앙고백 및 성경교제를 만들어낸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특별히 신앙고백서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한 독창적인 신학의 꽃이요 열매이며, 기독교 신앙을 지탱해 주는 중심 기둥이다. 철저한 성경을 바탕으로 한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영감과 계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십자가 구속,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기적과 인간의 책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교회의 본질과 성령의 역할, 재림과 종말 사상 등이 포함된 역사적, 기념비적인 것이 제정된 것이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조 ‘교회에 대하여’ 5항과 6항(R.C. 스프로울, pp.86-87)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5항 “하늘 아래 가장 순수한 교회들도 혼합과 오류 아래 있다. 그리고 어떤 교회들은 극히 타락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탄의 회당들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에게 예배하는 교회가 항상 존재할 것이다.”
6항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교회의 머리가 되는 다른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로마의 교황 역시 결코 교회의 머리일 수 없다”고 확실하게 비성경적 교회의 수장권 문제를 바로 정리했다. 그렇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진정한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신약성경 어디에도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교황(Papa)에 대한 근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신조는 유럽의 개혁신학과 영국의 청교도들의 신학이 조화를 이룬다. 예를 들면, 이 신조는 유럽의 개혁자들인 츠빙글리, 불링거, 칼빈, 베자, 영국의 구 어거스틴 전통을 추구한 사람들과 함께 청교도들이 포함된다. 이 신조는 존 낙스의 신조나 하이델베르크 신조 혹은 제 2 헬베틱 신조와 비교할 때 질적 양적으로 많이 보완되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의 저자인 개혁주의 신학자 R. C 스프로울(Robert Charles Sproul)은 “벨직 신앙고백서, 하이텔베르크 교리문답,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와 그 이외의 다른 신앙고백서들과 같은 역사적 신앙고백서도 표현과 위풍과 신학적 정확성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능가하지는 못 한다”고 극찬했다.
청교도혁명 주역이며 영국의 위인 크롬웰, 부정과 긍정 양면적 평가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청교도 신앙과 사상의 모체로 삶의 열매 돼
세계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교회사적 유산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역시 침례교 고백서에 대하여 논하면서 “이 고백서가 웨스트민스터 고백서를 가장 가까이 따른다”고 주장했다. 그 역사적 현장에 있었던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그의 저작 ‘생애와 시대’(Life and Times)에서 이 회의의 특성과 가치에 대해 “거기에 모인 신학자들은 탁월한 학식과 경건을 구비한 사람들로 목회적 역량과 충성이 뛰어났다. 나는 그들 중에 한 사람이 될 만한 자격이 없으나, 그들은 내가 아는 진리를 담대히 말하였다. 즉 신조의 모든 역사적 정보와 우리에게 남겨진 다른 증거로 판단해 볼 때, 사도시대 이후로 기독교 세계는 돌트 총회와 이 웨스트민스터 대회보다 더 훌륭한 신학자들의 대회를 결코 가지지 못했다”라고 칭송했다.
이와 같이 영국은 찰스 1세의 죽음과 함께 찰스 2세 왕정복고 전까지 계급 구조적인 성공회가 사라지고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중심으로 한 청교도적인 교회정치가 시행된다. 모든 영국 교회가 자율, 평등, 그리고 교회 사이의 연합이 실현되어 마치 영국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경과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643년 영국 의회가 당시 국왕이던 찰스 1세와 의회와의 내란(청교도 혁명)중에 영국 교회가 공통으로 따를 수 있는 전례, 교리, 권징 등의 기준을 수립할 필요를 느끼고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소집했다.
1647년 총회는 의회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승인을 요청하였으나 에라스투스주의(Erastianism) 즉, 국가가 교회정치 업무를 주도하는 것을 지지했던 의회는 조건부 승인(20,30,31장 거부)한다.
1649년 8월 웨스트민스터 총회 때, 예배모범(1645년)과 정치편람(1645년), 신앙고백서(1647년), 대, 소요리 문답서(1648년 9월 15일 의회 최종승인)를 채택했다.
1661년 반 청교도주의자 찰스 2세(Charles Ⅱ)는 영국 의회에서 통과시킨 신앙고백서를 무효화한다.
1690년 6월 윌리엄 3세(William of Orange 3) 때, 다시 의회가 신앙고백서를 비준했다.
2020년 현재,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의 신앙과 사상의 모체요 삶의 열매가 되었고, 전 세계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들이 사용하는 교회사적 유산이 되었다. 또한 한국 장로교회도 1907년 최초로 12신조를 작성할 때 그리고 신앙고백서, 대·소요리문답, 예배모범, 권징조례, 교회정치 등을 제정할 때 여과 없이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의 표준문서들을 채택하였다. 이것이 오늘의 한국교회가 세계적 교회로 성장하는데 큰 한 축을 담당했다.
[필자주] 7)웨스트민스터총회는 R. C. 스프로울(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해설1), 서요한(영국 청교도와 웨스트민스터 총회 소고), 오덕교(청교도 이야기), Thomas Leishman(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 저서와 논문, 그 외 자료들을 참조했다.
[알림] 본 연재 글의 순서가 지난 호와 바뀌었음을 알려드리오니 해량 바랍니다.
06.13.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