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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교회 1000년 - 어둠에 잠긴 구속역사의 현장(2)

조진모 목사

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힘을 소유한 교회 

중세교회를 시작하면서 교회와 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관계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있다. 게르만족의 이동과 함께 서유럽이 혼동에 빠져있을 때, 교회가 새로운 형태의 통일국가가 출현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교회와 국가가 서로의 필요에 의하여 동행의 길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를 대표하는 교황과 국가를 대표하는 황제 사이에 힘의 대결이 끊이지 않았다. 공존이란 구도 자체는 유지하였지만 누가 우위권을 차지하느냐에 대한 관심과 행동을 포기한 적이 없다. 즉, 중세교회 1000년의 역사는 교회와 국가의 갈등의 연속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과연 힘을 지닌 교회를 성경이 가르치는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교회와 국가 사이에 힘의 대결로 인해 파생되는 사건들을 안타까운 모습으로 바라볼 때마다 이 고민이 되살아난다. 교회가 국가의 권력에 눌려 고난을 당하는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에, 교회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은근히 찬성하는 것이 대부분 성도들의 생각일 것이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필요 이상의 힘을 지닐 때 타락하였다는 역사적 증거에 대해 관심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중세교회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막강한 힘을 지니게 되었고 권력을 휘두르면서 전에 없었던 추한 모습으로 타락하였다. 주님께서 교회를 이 세상에 두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영혼들을 복음으로 구원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양육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교회에게 부여하신 권위는 영적인 것이다. 중세교회는 자율적으로 교회의 존재목적을 수정하고 인간적 욕심을 채우려는 정치적 집단의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일을 정당화 하였다.  

1077년 카놋사의 굴욕을 기억할 것이다. 성직자를 임명하는 권한이 국가의 손에 있었으나, 교황과 다른 성직임명권을 교회의 손에 넣으려고 하였다. 결국 교회가 이겼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을 만나 선처를 구하기 위해 그 추운 겨울날씨에 성문 앞에서 2일간 기다리는 굴욕적인 일을 경험하였다. 교황과 교회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고 남았던 것이다.   

 

힘을 상실한 교회 

인간이 쌓은 권력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은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 중 하나이다. 1095년 십자군전쟁이 시작될 때만해도 교황의 권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약 200년이 지난 뒤 1272년에 이 전쟁이 종결될 때에는 이미 교회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였으며 교황의 권위 역시 날개 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상실한 교회의 힘을 다시 회복하기 위한 노력도 포기하지 않았다. 1302년, 교황 보니파시우 8세(1235-1303)는 ’거룩한 하나의 교회(Unam sanctam)’이란 유명한 칙서를 공포하였다. 이 칙령은 교황의 권위를 확정짓기 위하여 작성된 것으로, 세속 권력을 교황의 권력에 예속시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로서 그는 당시 갈등의 관계에 놓여있던 프랑스 국왕 필립 4세(1268-1314)를 파문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교황이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치욕과 수치를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1303년, 유럽에서 가장 강력했던 필립 4세가 보낸 군대가 교황의 별궁이 있었던 작은 마을 아나니(Anagni)를 습격하여, 교황 보니파시우 8세에게 교황직을 내려놓으라고 위협을 가하였다. 그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다가 주민에게 구출되어 로마로 돌아왔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받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곧 죽음을 맞게 되었다. 이 사건은 향후 교황이 힘을 잃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이 일로 널리 알려진 ‘아비뇽 유수’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교황이 힘 잃은 아비뇽 비수사건 이후 교회-국가 갈등 심화

교회가 필요 이상 힘 지닐 때 타락했다는 역사적 증거 남겨

 

아비뇽 유수(1309-1377)

아비뇽 유수(Avignonese Captivity, 幽囚)는 1309년부터 1377년까지 약 70년간 교황청이 이탈리아 로마가 아닌 프랑스의 작은 도시 아비뇽으로 옮겨져 머무른 시기를 말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시인이었던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는 이 사건을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노예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의 유사하다며 ‘바빌론 유수 (Babylonian Captivity)’라고 냉소적으로 비꼬아 부르기도 하였다.

아나니 사건이 있은 후 교황은 실권을 상실하고 프랑스 국왕의 영향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필립 4세는 클레멘스 5세(1264-1314)를 새 교황으로 세워놓고 1309년에 교황청을 아비뇽에 두게 하였다. 이 기간 동안 프랑스 출신의 교황과 추기경들이 대거 등용되었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 11세(1329-1378)가 로마로 귀한 함으로서 아비뇽 유수는 종식되었지만 교회와 국가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펼쳐지게 되었다.  

황제 그레고리 11세가 사망한 것은 1378년, 즉 아비뇽 유수가 종식된 다음 해였다. 혼동을 해결하기 위하여 로마에서 우르반 6세(1318-1389)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프랑스 추기경들이 우르반 6세를 아나니로 초대하였으나 1303년에 벌어진 사건을 기억하여 모임에 불참하였다. 그는 소신 있게 앞으로 교황이 아비뇽에 갈 일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서 프랑스 국왕과 프랑스 추기경들과의 새로운 긴장관계가 형성되었다. 

분노한 프랑스 추기경들은 콘클라베(Conclave), 즉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 시스템의 무효를 선언하였다. 그 대신 교황군 지휘자였던 로베르를 대립교황으로 선출하여, 그가 자신들을 이끌 교황 클레멘스 7세라고 주장하였다. 

아비뇽 유수보다 훨씬 상황이 복잡하게 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교황이 오직 한 명이었으나, 이제 교황을 로마와 아비뇽 두 곳에 두는 촌극과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교황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간주하던 교회에 큰 혼란이 초래하였다. 이로서 1054년 동서교회의 분열을 경험한 이후 1378년 서방교회가 분열됨으로서 어두운 중세교회 역사의 한 페이지를 더하게 된 것이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서방교회의 대분열(The Great Schism)이라 부른다. 

 

스콜라철학의 기독교 부정 주장 오컴, 종교개혁 불씨 제공

“교회는 영적 일에 중점 두고 세속 권한은 세속군주에게”

 

복음의 능력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 1280-1349)은 불필요한 것들은 잘라버려야 한다는 접근방법을 주장한 영국 출신 유명론자였다. 그는 스콜라철학이 계시의 종교인 기독교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도록 주도역할을 한 장본인이다. 당연히 중세교회는 그를 전통적 신앙에 도전하는 자로 낙인을 찍고 경계하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컴이 중세교회에 의해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의 정치사상 때문이었다. 아비뇽 유수가 진행 중이던 시기에 활동하던 그는 황제의 편에서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누군가 오컴의 사상의 이단성을 고발하여 교황이 그의 신학사상을 검증하게 되었고, 결국 아비뇽으로 소환되었다. 그 후부터 그는 교회정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전통적인 중세교회의 사상을 비판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특히 오컴은 자신이 속한 프란체스코수도회의 청빈사상을 비판한 교황을 이단으로 간주하였다. 1328년, 교황은 오컴을 파문하기에 이르렀다. 교회와 국가의 대결구도가 지속되던 상황에서 교황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던 그의 사상은 향후 종교개혁의 불씨를 제공하게 된 셈이다.   

오컴은 가톨릭의 교황주의 자체와 교황의 세속 권력을 인정하는 입장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철저한 가톨릭학자였다. 그러나 정치사상은 교권주위로 물든 이 시대 교회를 향해 중요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귀를 기울여 들어보자. 그는 교회와 국가 사이의 충돌로 인하여 생겨난 사회적 불안의 원인을 먼저 교권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오컴이 지녔던 고민의 핵심은 교회는 영적인 일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데 있었다. 그러므로 세속의 권한은 가급적 세속군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중세교회는 그의 주장을 수용할 만한 그릇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지닌 힘을 상실하게 하는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이 세속적인 힘을 더욱 비축할수록 더욱 급속도로 타락의 길로 빠져들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을 항상 기억하자. 우리에게 필요한 힘은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복음의 능력이다. 오직 그 능력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covenantch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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