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해변에도 묘지가 있는가? 있다. 해변에 얼마나 많은 죽음이 있던가. 많은 바람이 해변으로 달려와 슬픈 묘지를 만들어 놓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내뺀다. 해변뿐이 아니다. 9월의 가을을 정겹게 맞이하려 했는데 그 초순은 매우 거칠게 다가왔다. 특별히 태풍 ‘힌남노’는 여름을 완전히 밀어내면서 한국의 제주도와 동남부를 강타하여 큰 피해를 남겼다. 번듯했던 집과 건물들이 침수되고, 멋진 빌라가 가라앉고, 잘 자란 나무들은 부러지고 뽑히며, 불을 밝히던 전선들은 끊기고, 멀쩡한 길도 사라졌다. 태풍 직전까지도 폼 잡고 달리던 차들은 이리저리 널브러졌고 사람들도 죽었다. 어느 아파트에서는 지하 주차장의 차를 빼라는 안내 방송을 듣고 내려갔던 사람 여럿이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힌남노’가 잠시 지나갔을 뿐인데 그 자리는 묘지, 그 자체였다. 바람은 다시 보이지 않지만, 그가 만든 묘지는 너무나 비통하다.
‘해변의 묘지’는 해변에서 자라난 폴 발레리의 시(詩)이다. 24개의 연작으로 된 이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비둘기들 노니는 저 고요한 지붕은/ 철썩인다 소나무들 사이에서, 무덤들 사이에서/ 공정한 정오는 여기서 불길로 짠다. 쉼 없이 되살아나는 바다를!….” 이 시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과는 달리 그 결론은 죽음이 아니다. 묘지의 황량함이 아니다. 뜻밖에도 그 마지막은 이렇게 맺어진다. “바람이 분다——살아야겠다!/ 거대한 대기는 내 책을 펼쳤다, 또다시 닫는다/ 가루가 된 파도는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단배들이 먹이를 찾아다니는 이 잠잠한 지붕을!” 그렇다. 바람이 꼭 넘어뜨리고 죽음만을 몰고 오는 것이 아니다. 다시 일으키고 살리는 바람도 있다. 그런 바람이 어디에 있는가.
성령은 바람과 같다. 성령의 바람을 ‘프뉴마’라고 부른다. ‘프뉴마’는 태풍이라는 말로도 다 담아내지 못할 더 강력한 바람이다. ‘프뉴마’가 지나간 자리에는 ‘힌남노’와 견줄 수 없는 것들이 남는다. 상상치 못할 일들을 펼친다.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하소서 이 땅 고쳐 주소서/ 이제 우리 모두 하나 되어/ 이 땅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을 때/ 우리의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의 불 임하소서/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은혜의 강물 흐르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오 주의 영광 가득한 새 날 주소서/오 주님 나라 이 땅에 임하소서” ‘프뉴마’, 곧 성령의 바람은 황무한 곳에 회개, 변화, 능력, 부흥의 새날을 일으킨다.
바람이 불어야겠다. 부흥의 바람이 불어야겠다. 은혜의 바람이 불어야겠다. 해변에 묘지를 만드는 바람을 다시는 무서워하지 말자. 그런 바람보다 더 큰 바람을 사모하자. 세상에는 묘지를 만드는 바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절망의 묘지를 다시 열어 소망의 생명으로 일으키는 성령의 바람이 있지 않은가. 9월은 태풍의 계절, 묘지의 계절? 아니, 9월은 부흥의 계절, 생명의 계절이다. 그래서 나지막이 외친다. “바람이 분다——살아야겠다!”
09.10.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