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전통의 변화, 그가능성과 어려움

김성국 목사

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한창 논의 중이다. 진리의 문제라면 왜 논의하겠는가. 진리라면 기쁨으로 따르면 될 뿐이다. 진리 문제가 아니기에 논의를 하는 것인데 교회 본당 스크린을 바꾸면서 강대상을 임시로 변경시켰는데 뜻밖의 반응이 나와서이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는 웅장한 원목나무로 된 강대상이 회중석에 비해 높이 있었고 멀리 있었다. 성도들이 모두 올려다보아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그 자체가 권위가 있어 보였지만 회중들은 설교자의 얼굴만 보고 우렁찬 소리를 숨죽이고 들어야 했다. 이런 강대상의 배치는 개혁주의 교회의 전통을 따른다는 교회의 자부심이요 자세이기도 하였다. 필자는 그 전통에 담겨진 귀한 영적 의미는 언제고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임시로 변경한 낮은 강대상, 가까운 강대상에서의 설교를 성도들의 너무 친근히 여기는 것이 아니던가. 교회는 성도들의 feedback으로 무엇을 결정하고 움직이는 곳이 아니다. 외면할 수 없는 설교하는 필자도 그렇다. 성도들의 얼굴표정을 보고 설교하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느낌뿐 아니라 실제 그랬다. 

설교는 대화가 아니라 선포이다. 설교는 지식을 위한 강의가 아니라 복음의 외침이다. 설교는 이 세상의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고 그 어떤 것과도 비슷하게 여길 수도 없다. 이 설교의 근본은 타협할 수도 변경할 수도 없다. 그런데 선포와 외침도 권위적 선포가 있고 역동적 외침이 있다. 설교에서 말씀의 권위는 절대적이지만 주변 상황까지 권위적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칫 잘못하면 권위를 특정 공간과 상황에서만 기능한 것으로 불필요한 권위주의를 아름다운 정당한 권위로  혼돈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럴리야 없겠지만 먼 강대상, 높은 강대상의 구조 때문에 성도들이  말씀 자체를 가까이 하기 힘든 것으로 여긴다면 이 무슨 낭패이겠는가. 성도들이 가까이하기 힘든 강대상 위치 때문에 성도들이 설교자를 통해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말씀을 저 멀리 있는 설교자만의 것으로만 여긴다면 이 무슨 비극이겠는가. 

아무튼 임시 변경한 강대상으로 전통의 변화, 그 가능성을 보았다. 

강대상 문제만이 아니다. 이번 스크린 공사를 하면서 본당 앞에 있었던 십자가를 떼어 내어야했다. 그리고 스크린 공사 후에 떼었던 십자가를 바로 달지 않았다. 성도들이 궁금해서 묻는다. “언제 십자가를 다시 다나요?” “우리 본당 앞에 십자가는 아예 없앨 것인가요?” 그렇다. 모두가 개신교인이요 개혁주의자들인 그 누가 본당 앞의 십자가를 우상처럼 바라보고 의지하겠는가? 아무도 그런 사람은 없지만 수십년 동안 본당 앞자리에 있었던 십자가가 계속 안보이니 궁금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본당 앞의 십자가 부착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부분적으로 있기도 하였다. 필요한 논의가 전개된 것이다. 필자가 공부하고 안수를 받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는 본당 앞의 십자가 부착을 금하고 있다. 필자는 십자가 부착의 위험성을 직시한 바른 방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단 교회 현장에서는 다른 모습일 수 있다. 개 교회가 그 방침을 철저히 준수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교회도 다소 있으리라. 일부 교단의 입장을 넘어서면 다른 교단 다른 교회에서는 십자가 부착을 당연시 여기기도 하고 오히려 권고하기도 한다. 결코 우상으로서가 아니라는 견해와 함께 펼치는 방침이기에 그 또한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십자가가 하나님께서 그토록 금지하신 형상으로 여겨진다면, 그리고 그 자체에 무슨 영험한 힘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면, 안이든 밖이든 어느 곳에든지 십자가를 세워서는 안 된다. 십자가를 기독교를 표하는 상징으로 여기기에 교회당 위에 또는 예배실 앞에 세워두는 것이다. 베드로의 회개를 이끌어낸 닭 울음소리, 그래서 닭을 기독교의 상징으로 여기고 교회당 위에 닭 모양의 형상을 세워 놓은 교회도 있지 않던가. 교회의 상징이라면 닭보다는 십자가가 낫지 않은가. 아무튼 현대의 교회에서 십자가 부착 등의 위험성에 대한 논의는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첨예한 기술들로 본당 앞을 수 눟으면서 자칫 현대기술들을 지나치게 사랑하고 너무 신봉하여 본당 앞의 기술적 부분에 대한 논의가 더 많아지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는 그 어떤 것보다 현대기술이 교회 안에 우상화 될 위험성이 더 크다. 현대교회는 현대기술을 적절히 사용하되 철저히 경계해야 하리라. 아무튼 본당 앞에 오랫동안 부착했던 십자가 논의로 전통의 변화, 그 어려움을 절감했다. 

01.22.2022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