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려는가. 일찍이 그 대답을 멋들어지게 해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그렇다. 사랑이 심어진 곳엔 언젠가 눈물이 흐른다. 좋아서 울든, 괴로워 울든. 사랑은 어루만짐이라고 말한 시인이 있다. ‘사람과 ‘사랑’은 서로 닮은 글자인데 사람이란 단어에 있는 ‘ㅁ’을 어루만지면 사랑이란 글자에 있는 둥근 ‘ㅇ’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어루만짐이라는 것이다. 펠리컨이란 새는 사랑은 희생임을 보여준다. 배고픈 자식을 위해 먼 길도 나다니지만 먹이를 찾지 못하면 자기의 가슴을 뜯어 먹이고 병에 걸린 자식에게는 자기의 핏줄을 터뜨려 그 피를 넣어주며 죽어간다고 한다. 사랑은 ‘만병통치약’이라고 말한 이도 있다. 그러고 보니 사랑은 온갖 오류, 근심, 슬픔, 고독 등을 고친다.
12월이다. 모든 계절에 온갖 사랑의 이야기가 가득 차 있듯이 12월에도 사랑 이야기가 있다.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하러 오신 예수님의 성탄 이야기이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사랑 때문에, 죄인을 용서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복음은 사랑 이야기이고 사랑의 중심에는 용서가 있다. 미우라 야아꼬의 소설 ‘양치는 언덕’이 있다. 목사의 딸 나오미와 친구의 오빠 료오이찌의 사랑 이야기가 아프게 이어진다. 못된 료오이찌는 천벌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는 용서받은 자로 죽는다. 그리고 그 소설에서 미우라 야아꼬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한다. “사랑이란 용서다.” 잘못된 길로 갔던 양을 다시 찾아내는 소설 ‘양치는 언덕’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용서로 풀어낸 작품이다. 사실 이 세상에 용서가 필요 없는 자가 누구인가. 사람은 누구나 용서가 필요하다. 사랑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그의 마지막 서신서 마지막 부분에서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바울에게 계절의 겨울, 인생의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 그는 무슨 말을 했을까? “내가 처음 변명할 때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십자가 예수님 앞에서 제자들이 줄행랑을 놓았듯이 바울이 가장 어려울 때 그와 함께 한 자는 아무도 없었고 적극적으로 다 그를 버렸다고 한다. 바울을 자기의 가슴에 못을 박은 자들을 사랑으로 품고 이렇게 말한다.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그들을 용서했다. 바울이 그의 인생 12월에 보여준 사랑은 용서였다.
12월이다. 겨울이다. 점점 추어진다. 만일 이 시간이 내 인생에 마지막 시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아쉬움이 클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아쉬운 그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고 단 하나의 일만을 할 수 있다면 무엇을 하려는가. 그 선택은 자유겠으나 결코 용서 못할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사실, 용서의 가장 큰 수혜(受惠)자는 용서받는 사람이 아니다. 용서하는 그 사람이다. 누군가를 제대로 용서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아직 용서의 예수님을 깊이 만나지 못한 사람이다. 자, 12월이다. 이제 그 시간이다. 용서할 시간 말이다. 그렇다. 성탄의 계절 12월의 사랑은 분명하다. 12월의 사랑은 용서다.
11.20.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