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여기 도둑이 있습니다.” 얼마 전 설교시간에 그렇게 폭로했다. 성도들이 흠씬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렇다. 그 시간 거기에 도둑이 있었다. 최근에 필자가 섬기는 교회가 위치한 뉴욕 플러싱의 한인 교회 두 곳에 도둑이 들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그런 좀도둑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강도 같은 도둑이 성도 가운데 분명히 있었다. “그럼 왜 경찰에 직접 신고하지 않고....” 의아해하면서 그렇게 말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경찰이 잡아낼 도둑이 아니다. 그 도둑은 성도들의 호주머니나 가방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 마음에 넘쳐야 할 기쁨과 감사와 평안을 앗아가는 심각한 도둑이다.
살리에리는 그런 도둑을 맞았다. 그리고 평생 힘들게 살았다. 영화 아마데우스는 처음부터 도둑맞은 살리에리의 처참한 모습을 보여준다. 사울도 그런 도둑을 맞았다. 그도 역시 도둑을 맞은 이후 비극의 생애를 보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헤집고 다니는 그 도둑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 이름은 다름 아닌 “비교(comparison)”이다. 살리에리는 비엔나의 궁정음악장이었다. 그의 위치나 재능은 이미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살리에리는 자기보다 훨씬 어린 모차르트의 재능과 자신을 비교하며 일생을 불행하게 산다. 신을 잘 섬기려는 자신에게 저 천방지축(天方地軸) 살아가는 모차르트보다 못한 재능을 주었다고 신을 원망도 한다. 영화에 보면 살리에리는 평생을 시기 질투로 보내다가 모차르트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자신도 자해한다. 자해 이후 정신병원에서 과거를 슬프게 회상하는 살리에리, 가련하다. 사울은 그 이상이다. 사울은 잘생긴 왕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사람들이 자신을 천이라 하고 다윗을 만만이라 하는 노래를 견딜 수 없어 다윗을 시기 질투하다 못해 아예 그를 죽이려는데 일생을 쏟아 붓다 비참하게 죽었다.
“비교”는 기쁨의 도둑이다, 평안의 도둑이다. 믿음의 도둑이다. 감사의 도둑이다. 겸손의 도둑이다. 그 좋은 것들을 다 앗아가는 심각하고 아주 못된 도둑이다. 설교 중에 말했던 도둑이 바로 “비교”라는 도둑이었다. 다른 이를 말해 무엇 하랴. 내가 바로 그랬다. 나의 불행은 누가 가져다 뿌린 것이 아니다. 나의 불행은 나의 비교하는 삶에 있었다. 나의 불만은 비교에 있었다. 나의 열등감은 비교에 있었다. 나의 교만은 비교에 있었다. 사실, 아직 완전히 몰아낸 것은 아니지만 언제부터인가 “비교”하는 삶을 멈추고 “나는 그 자체로서 소중한 나”임을 다시 깨닫고 살기 시작했을 때 기쁨과 감사와 평안이 회복되었다. 성도들에게 그런 삶의 회복을 위해 “비교”라는 도둑을 쫓아내자고 그날의 설교에서 외친 것이다.
다윗은 누구와도 자신을 비교하지 않았다, 자신을 신묘막측(神妙莫測)하게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일평생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았다.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내 앞에 어려운 일 보네/ 주님 앞에 이 몸을 맡길 때/ 슬픔 없네 두려움 없네/ 주님의 그 자비로운 손길/ 항상 좋은 것 주시도다/ 사랑스레 아픔과 기쁨을/ 수고와 평화와 안식을” 지금 내게 있는 것, 그것이 아픔이든 어려움이든 하나님이 주신 가장 좋은 것이라고 고백하며 살아갈 때 슬픔과 두려움은 사라지고 기쁨과 평안이 깃든다. 내 주변에 잘못 놔두었다간 “한 방”에 훅 간다. 그러니 평생 조심하자. 도둑 조심하자. “비교”라는 못된 도둑을.
[정정] 1835호 2면 발행인 칼럼 제목을 ‘“함께”의 미학(美學)’으로 바로잡습니다.
08.07.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