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수많은 사람을 질곡(桎梏)으로 몰아넣었던 공산주의는 아직 맹위(猛威)를 떨치는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왜 공산주의를 겨냥한 미국 일본 호주 인도의 4자 협의체인 쿼드(Quad)가 더욱 강화되어 가겠는가. 아직도 공산주의는 세계의 이곳저곳을 넘보고 있고 좌파 이념에 물든 지도자들과 세력들이 여전히 상당하다. 이 칼럼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제도를 논하려고 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와 공산주의를 잠시 살펴보려는 것이다. 유물론을 앞세워 사람을 위한다는 공산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 왔다. 거기에 무신론을 표방하는 공산주의의 기독교 핍박은 초대교회에 있었던 로마의 기독교 박해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렇다면 공산주의는 궁극적으로 기독교를 이길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공산주의는 결코 기독교를 이길 수 없다.
공산주의는 사상이 대단히 견고한 것 같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자. 그들은 가장 중요한 신과 인간에 대한 이해부터 잘못하고 있다. 초월적인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타락에 대한 관점이 없다. 혁명을 통해 생산과 분배의 방식을 잘 바꾸어 놓으면 그 다음에는 유토피아가 온다고 어리석게 믿고 있다. 인간의 죄와 구원에 관한 몰이해(沒理解)가 더해져 삶과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계속 장밋빛 낙관론으로 선동한다. 이 세상에서 주권적으로 활동하시는 초월적인 창조주를 섬기는 기독교를 사상적으로 범접할 수 없는 얄팍한 사상의 공산주의가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기독교의 세계관은 창조와 종말을 넘나들고 타락과 구원을 아우르는 진리 위에 세워졌기에 어떤 시대의 도전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은 약속한다. “새 옷”을 입혀주겠다고.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경멸하고 타도했던 사회의 기득권을 비틀어 교활하게 행사하며 자신들만 새 옷을 입고 소위 인민(人民)에겐 헌 옷도 제대로 못 입힐 경우가 많다. 어쩌다 새 옷을 입어도 사람이 바뀌지 않아 어색하고 우스꽝스럽다. 공산주의는 역사 안에서 모든 것을 너무 많이 희망하고 있다. 그 거짓 희망에 스스로 속고 있고 남도 속이고 있다. 기독교는 외친다. “새사람”이 될 수 있다고. 그렇다. 새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면 모든 것이 다 바뀐다. 역사 안에서 그리고 역사를 넘어서까지 변화가 일어난다. 역사 속에서 “새 옷”을 입는 것을 넘어서서 역사 너머에서 “흰옷”을 입고 영원히 산다. 알량한 “새 옷”의 공산주의가 근원적인 “새 사람”의 기독교를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자명(自明)하다.
공산주의자들이 때때로 기독교를 이기는 것 같다. 의기소침해지지 말자.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으니 공산주의 안에는 기도하는 사람이 전혀 없고 기독교 안에는 기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믿을 이가 자기 자신밖에 없다. 가족과 친구와 동료와 타인에 대한 의심이 난무하니 배반과 숙청과 죽임은 자연스러운 과정들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그 힘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기도 없는” 공산주의가 “기도하는” 기독교를 결코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세상이 연합해서 어떻게든 공산주의와 맞서려는데 진정한, 그리고 유일한 승리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기독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07.24.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