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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영성, 어린아이에서 찾다

김성국 목사

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 왔다. 상큼한 바람결에 어린 나무들이 아직은 옅은 푸른 옷을 입고 훌쩍 발 돋음 하는 5월의 첫 절기가 5일인 어린이 날이다. 팬데믹의 어려움이 아직 가시지 않고 있으나 한국에서는 우리가 그 옛날 불렀던 이런 노래가 또 다시 불려 지리라.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아무 걱정 없이 뛰놀던 그 어린 시절이 그립다. 

 

“쪼그만 게 까불어.” 적지 않은 어른들이 이렇게 어린아이들을 무시하곤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너무 좋아하셨다.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부모들을 꾸짖을 때 예수님은 아이들을 안아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도 하셨다.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도 하셨다. 예수님은 천국은 어린아이 같은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라고 하셨다. 어린아이들은 예수님을 드러낼 뿐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신성한 존재들이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의 특징을 “자기를 낮추는 사람”(마18:4)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도 자기를 낮추셨다”(빌2:8) 그러니 “자기를 낮추는 것”은 기독교 영성의 정수(精髓)가 아닐 수 없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어떤 사람이 사역을 할 만한 사람인지 그 영적 적합성을 체크할 때 살펴봐야 할 것들 중 하나는 그 사람이 아이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살펴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사람, 곧 어린아이와 함께 있게 해보면 그 사람의 영성을 엿볼 수 있으리라.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어린아이는 특권의식이 없다. 놀거나 무엇을 할 때 열심히 땀을 흘릴 뿐 어른들처럼 이해타산(利害打算)에 젖어있지 않다. 그들에게는 사회의 아픔인 ‘갑’의 교만도 ‘을’의 비굴도 없다. 어린아이들은 얼굴이 곧잘 붉어지고 자기를 곧잘 감춘다. 그들에게서 어떤 영성을 찾을 수 있나. “자기부인”의 영성이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자기 “소유”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다. 움켜쥐는 것보다 자기 손에 있는 것을 나누면서 은연중에 “관계” 중심의 삶을 산다. 남을 도우면서 희열을 느낀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린아이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자기를 낮추는 영성은 다른 자를 위해 기꺼이 희생한다. “십자가를 짐”의 영성이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의존적인 사람이다. 어린아이들은 자기 혼자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늘 아빠를 찾고 엄마를 부른다. 자기를 낮추는 영성은 늘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기도”의 영성이다.

 

자기부인, 십자가를 짐, 그리고 기도의 영성이 어린아이들에게서 찾아진다는 것이 경이롭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영성이 아니라면 무엇이 기독교의 영성이겠는가. 계관시인(桂冠詩人) 윌리엄 워즈워드는 그의 시 “My Heat Leaps Up”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시인은 어른이 되었어도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몹시 뛰었나보다. 

05.0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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