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올 것이 왔다. 코비드19 바이러스가 드디어 내게도 왔다. Rapid는 음성판정을 받았으나, PCR로는 양성판정을 받았다. 잠시지만 지금은 교회의 모든 예배를 비 대면으로 드리고 있고 나는 집에서 회복 중이다. 나의 여러 가지 약함으로 늘 교회에 부담을 주어왔는데 또 큰 부담을 주게 되었다. 언제나 그러하셨듯이 교우들은 약한 나를 따듯하게 감싸주고 앞 다투어 금식 기도로 함께해 주고 있다. 자격 없는 자가 받고 있는 눈물겨운 사랑이다. 약함이 강함이 될 수 있음은 교우들의 사랑과 믿음의 기도 때문이다. 지난 주 목양칼럼을 이렇게 썼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베드로가 헤롯왕에 의해 잡혔습니다.... 교회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밤에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를 옥에서 끌어냈습니다. 교회가 기도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교회가 함께 기도할 때 늘 놀라운 기적이 있었습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기도할 때 기적을 허락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어려울 때 불편과 염려를 드려 죄송합니다. 부족한 저를 위해 금식도 하시고 기도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여러 날 제 몸 곳곳을 짓눌렸던 고통의 착고(着錮)들이 하나씩 풀리고 있습니다.... 저는 곧 다시 일어나 교회로 달려갈 것이고 우리는 또 위대한 행진을 새롭게 시작할 것입니다.”
가족들의 걱정도 컸지만 기도는 더 셌다. 아내는 무섭지도 않은가. 내 옆에서 밤낮없이 정성으로 챙겨준다. 어렸을 적부터 나의 약함을 보아왔던 가족들은 목회 평생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어느 누님은 이런 글을 보내주셨다. “겨울이 없는 나무는 자랄 수 있어도 열매는 맺지 못합니다-존 번연” 고난이 있어야 열매도 있다는 위로의 글이다. 그러다 보니 아픈 겨울이 오히려 희망의 겨울이 된다. 막내 누님은 녹슬지 않은 피아노 반주와 함께 찬송을 불러 녹음해 보내주셨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집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 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그렇다. 모든 성도들이 그랬듯이 나의 지난 길들이 쉽지 않았다. 앞 길 또한 멀고 험하리라. 어떻게 할까? 누님이 부른 찬송처럼 나 주님만 따라 가리라. 가족의 사랑과 격려는 약함을 강하게 해준다. 가족 같은 여러 지인들의 넘치는 위로, 그리고 마음이 따듯한 의료진들의 전문적인 도움도 약한 자를 강하게 일으키는 힘이었다.
“약함이 강함입니다” 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따님이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목사님의 글이다. 따님의 이름은 “Joy”이다. 목사님은 사물을 완전히 다르게 보고 계셨다. 약함 속에 슬픔과 좌절을 보신 것이 아니라 기쁨과 사명과 강함을 보신 것이다. 약함이 위축과 비굴의 모습으로 표현된다면 이처럼 서글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바울은 약했다. 건강이나 언변이나 외모가 약했다. 그런데 당당했다. 아주 강했다. 오히려 자기의 약함을 자랑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 약함의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함이 오히려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냈다. 약함이 없는 자 없다. 그 약함은 우울하게 살라는 저주의 약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강함을 자랑하라는 축복의 약함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약함을 강하게 만든다. 이제는 나의 어떤 약함도 두렵거나 부끄럽지 않다. 약함이 강함이 되는 길이 이처럼 여럿이 있기 때문이다.
02.13.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