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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의 잔(盞), 송명희의 잔(盞) 그리고 나의 잔(盞)

김성국 목사

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걷는 사십일이다. 어떻게 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 주기철 목사님은 십자가의 감격 때문에 사십일도 아니요 넉 달도 아닌 5년의 옥고(獄苦)를 묵묵히 견디시다 순교하셨다. 목사님은 이런 옥중묵상(獄中黙想)을 남기셨다. “전 주님 아닌 것에 절대 경배하지 않을 겁니다. 설령 내 목숨을 가져가더라도 전 경배하지 않을 겁니다. 내 몸을 가두고 고통 가운데 던져 놓더라도 전 주님 아닌 다른 것은 경배하지 않을 겁니다. 경배의 흉내도 내지 않을 겁니다.” 

목사님의 중심에는 예배가 있었다. 바른 예배에 목숨을  거신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바른 예배가 우선순위가 아닌 오늘의 시대에 부끄러움과 함께 큰 울림을 주는 옥중묵상이다. 목사님의 옥중목상은 이렇게 이어진다. “어떤 이는 나에게 왜 괜한 일로 목숨을 거느냐고 말을 합니다. 또 다른 이는 가족 생각은 않고 자기의 의지만을 주장한다고 말합니다. 한 친구는 우리가 진심으로 한 것이 아니니 그건 주님 앞에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제는 적절히 타협하자고, 먼 훗날을 기약해서 한걸음 물러서자고 합니다.” 

그렇다. “적절히”와 “먼 훗날”은 마귀의 단어이다. 우리가 “적절히” 할 때에 마귀는 “매섭게” 공격할 것이고 우리가 “먼 훗날”로 미룰 때 마귀는 “지금” 설칠 것이다. 내 목에 태인 십자가는 오늘 철저히 지고 가야한다.

“하지만” 목사님의 옥중묵상은 하지만으로 이어진다. “우리 예수님은 날 위해서 십자가 지고 그 고통 다 당하셨는데 나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모른 체 하겠습니까?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른 것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이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답하리이까?” 주기철 목사님은 언제나 주님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종말론적 신앙으로 초지일관하셨다. 훗날 주님이 물어보실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의 답을 온 몸으로 쓰면서 걸어가셨다. 

송명희씨는 이렇게 애잔한 글을 썼다. “주님의 쓴잔을 맛보지 않으면 주님의 쓴잔을 모르리. 주님의 괴로움을 당하지 않으면 주님의 고통을 모르리. 주님의 십자가를 져보지 않으면 주님의 죽으심을 모르리. 주님의 쓴잔은 내 것이요 주님의 괴로움 내 것이며 주님의 십자가 내 보물이라. 또한 그의 부활 내 영광이리라” 뇌성마비 시인인 그의 인생은 이미 쓰고 쓴 것 같지만 주님의 쓴잔을 마셔야 주님의 부활에 영광스럽게 참여할 수 있다고 의미심장하게 노래하였다. 

주기철 목사님은 직접 뵙지 못했지만 아주 오래전 자신의 온 몸으로 주님의 사랑을 간증하던 자리에서 송명희 시인은 직접 뵌 적이 있다. 뵈었던 아니든 주기철 목사님의 “고난의 잔”과 송명희 시인의 “주님의 쓴잔”은 편함과 달콤함의 자리에 안주하려던 나를 흔들어 세운다. 그렇다. 사순절이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십자가를 외면하고 지상(地上)의 편함이나 구하는 이때에 나도 주기철 목사님처럼, 주님이 물으실 질문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 대한 정조(貞操)와 절개(節槪)를 담은 답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겠다. 달콤함에 포로가 되었던 살았던 삶을 내려놓고 ”주님의 쓴잔“을 마시며 살아야겠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아~ 사순절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03.07.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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