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며칠 전 기생충을 보았다. 전 세계 영화계에 연일 화제를 뿌리며 지금은 곧 있을 아카데미상 여러 부분에 후보가 된 영화이다. 모든 문화가 그렇듯이 보는 이에 따라 이 영화의 해석이 다양할 수 있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면 빈부의 구조적 문제를 선명히 담고 있다. 전체 줄거리에 “거짓과 폭력”을 방법으로 한 계급투쟁의 요소를 감추지 않고 있다. 줄거리는 얼듯 그렇게 보여도 이미 전 세계적으로 정당성을 상실한 계급투쟁의 사악한 방법론을 새삼 다시 꺼내들어 세상을 과거로 돌이키려는 의도가 이 영화의 주제라면 사람들이 그렇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나의 영적인 관점으로 볼 때 이 영화는 가진 자와 없는 자로 편 가르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옥과 천국의 이야기이다.
가난한 자들의 반지하방이든 부자들의 대궐 같은 집이든 이 세상은 여전히 지옥일 뿐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무슨 수단을 써서 가고자하는 곳은 그저 지옥에서 또 다른 지옥으로 가는 것 뿐이다.
요즘 수개월 동안의 산불로 전 세계인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고 있는 호주에서 오래 전 있었던 일이었다고 한다. 교도소로 매일 빵을 배달해오는 트럭이 있었다. 그 교도소의 한 죄수가 그 트럭에 몰래 숨어 탈출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그는 먼저 모범 죄수가 되려고 애썼고 마침내 빵을 싣고 나르는 부서에 배치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왔다. 그는 트럭 안의 빈 박스에 몸을 숨겨 지긋지긋했던 교도소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차가 한참을 달려 어느 장소에 멈추었다. 인기척이 없는 틈을 타 박스에서 빠져나와 트럭 밖으로 뛰어내렸더니 이게 웬일인가? 자기가 내린 장소 주변에는 여전히 철조망이 둘러쳐 있었고 총을 가진 교도관들이 여기저기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연실색(啞然失色)하여 찬찬히 둘러보니 그곳도 교도소였다. 자기가 탔던 트럭은 이곳저곳의 교도소들을 왕래하며 빵을 공급하는 교도소 전용(?) 트럭이었다. 그 죄수는, 자기가 잡혀있던 교도소에서 탈출했다고 좋아했건만 단지 다른 교도소로 옮겨갔을 뿐이었다.
영화 기생충에서 지옥같이 지긋지긋한 반지하방에서 살던 가난한 가족 네 명이 거짓과 거짓을 이어 부잣집으로 한명 한명씩, 결국 다 들어간다. 힘들여(?) 들어간 그곳이 천국이던가. 그 화려한 집 지하에 만들어진 방공호는 확실한 피난처나 영구한 안식처이던가. 아니다. 그곳은 넘어지고 깨지고 죽이는 끔찍한 또 다른 지옥이었다. 다 끝난 것 같던 영화는 그 부잣집의 지옥을 경험한 자가 여전히 그 집을 향한 욕망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며 엔딩 자막을 올린다.
영화 감독자에게 그런 의도는 없었었던 것 같은데 영화 기생충은 모든 인류에게 천국은 스스로 만들거나 쟁취할 수 없다는 경종(警鐘)을 울린다. 그렇다. 천국은 없다. 이 세상에 그들이 욕망하는 그런 천국은 없다. 환경이 바뀐다고 기생충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제 아무리 환경이 바뀌어도 타락한 인생이 가는 곳은 여전히 지옥일 뿐이다. 그러나 기생충 같은 존재를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시는 예수님을 만난 자에게는 천국은 있다.
01.25.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