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끝끝내 개혁되지 않으려는 교회에는 또 다른 종교개혁이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많은 젊은이들이 종교개혁 당시의 상황에 방불한 교회의 현실 앞에 좌절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눈물은 흘리고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할지 몰라 스스로 답답해하고 있다. 길은 있다. 루터가 되는 것이다. 이 시대에도 루터가 필요하다. 오늘의 루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연구하라. 면죄부를 사는 것이 구원 얻는 방법이라는 거짓 주장, 고행이 구원의 길이라는 억지가 난무하는 시대 속에 루터는 성경을 연구하고 연구했다. 마침내 그는 성경에서 사람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참된 구원의 길을 찾은 감격을 무엇에 비교할 수 없었으리라. 성경에 대한 그의 폭넓은 실력은 그의 사역 전체에 계속 묻어났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것이 루터가 걸었던 첫 번째 걸음이었다. 성경적 근거도 없이 자기의 감정이나 여론의 추이를 가지고 무엇을 바꾸려는 시도는 가소로운 것이다. 오늘의 루터가 되려는 젊은 개혁자들에게 가장 우선적인 것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다. 말씀의 실력자가 되라. 말씀으로의 개혁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개혁이 아니다.
글을 쓰라.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성당에 글이 붙게 된다. 이 글이 전 세계를 바꾸는 글이 되었다. 로마카톨릭을 정면으로 비판한 루터의 95개 조항의 글이다. 글은 무엇보다 글 쓰는 사람의 생각을 정리해준다. 글은 말처럼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 남아 있는 것이기에 그것을 받아든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 글에 영향을 받는다. 담임목사님이 너무 견고하신가? 장로님들의 변화를 거부하시는가? 개혁을 소망하는 젊은이들이여, 그들을 존중하면서 변화의 필요성을 감동적으로 담아낸 편지나 이메일을 보내보시라. 그것을 받은 사람들은 적잖이 고민하게 될 것이다. 놀라운 변화가 생각보다 일찍 시작될 수도 있다.
담대하라.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가 있었다. 37세의 루터가 황제 카를 5세로부터 소환된 어마무시한 자리이다. 루터의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는 결정도 가능한 자리였다. 그 자리에 있던 고관대작들의 눈에 애송이 같았던 루터는 결코 떨지 않았다. 물론 타협도 없었다. 루터는 담대했다. 그는 말씀에 매여 있었고 양심을 더럽히지 않았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강청하며 또 확신하며 꿋꿋이 서 있었다.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담대함이 개혁자의 모습이다. 내가 죽고자 할 때 개혁의 꽃은 피어난다. 소심함으로 또는 나는 어떻게든 살고 보겠다는 마음으로는 개혁의 “개”자도 꺼내지 말자.
기다리라.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루터는 갈 곳이 없었다. 그때 프리드리히 3세라는 제후가 루터를 바르트부르크 성 안에 머물게 하였고 그를 보호해주었다. 그는 거기서 칩거의 시간을 보냈다. 그저 숨어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입 다물고 있던 것의 그의 전부가 아니었다. 그 시간 그는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렸다. 그의 기다림은 일의 전개됨과 그의 성숙함의 다른 이름이었다. 조급하지 말라. 하나님의 시간을 앞서려고 나대지 말라. 개혁주의자에게 필요했던 것은 기다림이었고 오늘의 젊은 개혁자들에게도 그런 기다림이 필요하다.
이렇듯 오늘에도 루터가 되는 길이 있다. 이 시대의 루터는 어디에 있는가.
10/26/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