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퀸즈장로교회 담임
상처는 아프다. 버겁다. 두고두고 문제다. 이 세상에 상처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모든 인생이 가지고 있는 상처는 가벼운 흠집 정도가 아니다. 상처더미라 할 정도로 많고 크다. 그리고 그 상처에서 악취가 난다. 그렇다고 상처는 부정적인 것만이 아니다. 영롱한 진주는 상처 입은 조개에서 만들어진다.
요엘서 2장에 보면 군대 같은 메뚜기 떼가 온 지면을 덮는다. 그것들이 죽어 악취를 낸다. 이제 먹을 풀이 없고 과실이 없으니 짐승도 죽게 되었고 사람도 큰 문제가 된 것이다. 거기에 놀라운 반전(反轉)이 일어난다. 죽어 악취를 풍기는 메뚜기 떼가 좋은 거름으로 변한 것이다. 땅에 거름이 가득하니 절망의 땅이 풀이 나고 열매를 맺는 양질(良質) 땅이 된 것이다. 상처더미, 악취더미가 좋은 것을 꽃피우는 거름더미가 된 것이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어 묻힌 무덤 앞으로 가셨다. 무덤 앞에 있는 돌을 옮기라고 하셨다. 그 때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이렇게 말한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사실이다. 팔레스틴 땅에서 사람이 죽어 나흘이 되었다면 냄새가 나는 것은 사실이다. 예수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시는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냄새 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돌문을 열라고 하셨다. 오래 된 상처의 냄새를 덮어둔다고 능사(能事)가 아니라는 것이다. 상처의 문을 열 때 진정한 치유가 있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다.
다말은 상처의 여인이었다. 남편 엘이 죽었다. 엘이 누구인가. 유다의 아들이다. 야곱의 손자이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의 역할을 해야 한다. 결혼에 있어서도 그렇다. 엘의 동생 오난은 형수였던 다말을 아내로 취하게 된다. 오난의 어이없는 행동은 다말로 임신치 못하게 하였다. 이 슬픔의 여인은 오난의 동생 셀라와 더불어 자녀를 가져야 했으나 셀라는 너무 어렸다. 다말은 친정으로 물러가 있어야 했다. 이 무슨 수치인가. 이 얼마나 큰 상처인가. 다말은 하마터면 상처더미 가운데 그 인생을 끝낼 뻔 했다. 그는 상처를 가지고 수세적(守勢的) 자리에서 있었다가 공세적(攻勢的) 위치로 옮겨갔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를 통해 베레스와 세라라는 두 아들을 갖게 되었다. 그는 예수님의 족보에 당당히 그 이름을 두었다. 그가 상처에 신음하고만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상처를 드러내며 분연(奮然)이 일어섰을 때 더 이상 상처의 여인이 아니라 축복이 여인이 된 것이다.
사람마다 어렸을 적부터 상처가 무수하다. 어른 때까지의 상처가 범벅되어 냄새, 악취가 난다. 그대로 덮어 둘 것인가. 예수님은 열라고 말씀하신다. “상처를 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또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겠는가. “나도 있었다. 너와 같은 상처가. 내가 안다. 너의 아픔을.” 예수님은 이렇듯 우리의 상처를 보고 이해하시고 위로만 하실 분이 아니시다. 상처더미를 거름더미로 만들어 놀라운 일, 아름다운 일, 열매 맺는 일, 그리하여 마침내 상처의 악취를 향기(香氣)로 만들어 가시는 전문가(專門家)이시다. 그분은 상처받은 치유자이시지 않은가.